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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호
달무리지는
2011. 3. 16. 18:47
강릉시내에서 남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시동역이라는 작은 간이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강릉 사람들도 거기에 기차역이 있었는지 잘 모를 정도로 남아 있는 폐역의 흔적조차 미미합니다. 기록을 보니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시동역에 기차가 섰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온 영동선 기차가 정동진과 안인을 거쳐 따로 역사(驛舍)도 없는 시동역에 잠시 섰다가 강릉으로 갔습니다.
역이라고는 하지만 두 줄기 기찻길만 있지 기차가 서로 비켜지나갈 교행선도 없는 말 그대로 간이역입니다. 정동진에서 북쪽으로 올라와 안인역이 있고, 안인역에서 불과 1.7km쯤 떨어진 곳에 시동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3km쯤 거리에 강릉역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서울의 전철구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기차말고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당시 시내버스 대신 기차가 마을사람들을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에 마을마다 시내버스가 들어가며 역사도 역원도 없는 이 간이역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 ▲ 우리나라에 몇 개 되지 않는 석호인 풍호. 바우길 7구간의 이름을 풍호연가라 한 것도 이 호수의 사라져감을 안타까워해서다.
- 사라진 간이역 시동역, 석호였던 풍호
지금도 기차여행 동호회에서 가끔 이곳 시동마을에 사라진 옛 기차역의 흔적을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도, 제대로 된 플랫폼도 없던 역이라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기차역의 흔적에 대해 그 자리가 정확하게 여긴가 저긴가 긴가민가하게 여깁니다.
그런 시동마을에 풍호라는 석호가 있습니다. 석호는 바다의 파도가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낸 자연 호수입니다. 파도가 바닷가 모래를 둑처럼 떠밀어올려 바다로 잔잔하게 흘러들어오는 냇물을 바다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모랫둑이 생기니 자연 거기에 호수가 생깁니다. 비교적 수심이 낮고 물결도 잔잔합니다. 보름날이면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하늘, 바다, 호수, 술잔, 님의 눈동자) 강릉 경포호수 역시 이렇게 파도가 모래를 떠밀어 올려 만들어낸 석호인데, 이런 경포호수의 3분의 2 정도 크기였던 풍호가 지금은 자연의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1970년대에 안인 바닷가에 영동화력발전소가 생기면서 이 화력발전소에서 사용하고 나온 회탄(석탄재)을 옆에 있는 풍호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지을 땅만 중요했지, 벼 한 포기 꽂지 못할 호수나 늪 같은 것은 쓸모없는 땅에 불과했던 거지요. 그렇게 40년 가까이 버려온 회탄으로 풍호가 지금은 그곳에 호수가 있었다는 흔적만 남기듯 작은 소택지처럼 변하고 연못 주변에는 30만 평의 갈대밭이 우거졌습니다.
학산오독떼기 마을에서 안인 바닷가까지 가는 이 길의 이름을 ‘풍호연가’라고 붙인 것은 이곳 풍호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발전소 회탄으로 호수를 메운 풍호 주변 30만 평의 갈대밭을 정리해 골프장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처음 결정할 때에도 골프장이 들어오면 안 된다, 아니다, 들어와야 마을이 발전한다, 하고 꽤나 시끄러웠던가 봅니다. 그러나 어떤 개발도 반대의견에 묻혀 그게 실행되지 못했던 예는 거의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강댐 건설 반대와 내린천댐 건설 반대 정도가 반대쪽의 목소리가 개발 쪽의 목소리를 이겼던 몇 안 되는 사례들이 아닌가 싶은데, 지금 동강과 내린천에 댐이 건설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참 끔찍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