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교회

월산리를 지나 춘천으로 간 무스 선교사

달무리지는 2012. 4. 28. 20:35


춘천으로 가던 무스 선교사가
월산리 답내리 마을에 들려 가는 것을 계기로 월산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아래 글은 무스 선교사에 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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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수도였던 춘천에는 이미 1898년에 매서인(賣書人)들에 의해 전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나봉식과 정동열이다. 이 때 성서공회와 성교서회(지금의 기독교서회)에서는 매서인들을 고용하여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반포하면서 전도하게 하고 선교의 관리는 각 지역의 교파 선교사들에게 맡겼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강원도 선교에 착수하고 있던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관리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미 남감리교회는 강원도 철원과 김화 지역에 매서인들을 보내어 선교에 착수하고 있었다. 1900년 9월 강원도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하디 선교사는 춘천을 중심으로 인근지역 20여 곳에 믿기를 결심한 이들이 각각 2명에서 7, 8명씩 생겨났다고 보고하였다. 들에 나가 수확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즉 선교사들은 전도를 한 매서인을 앞세워 이곳들을 방문하여 세례를 주고 정식으로 교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수확에 나선 선교사는 무스(J.R.Moose)였다. 그는 춘천으로 떠나면서 신실한 전도인으로 소문나있던 이덕수를 데리고 갔다. 이덕수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임진강변의 고랑포(高浪浦)태생으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술과 놀음에 빠져 살면서 툭하면 아내를 매질하는 못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그 마을에 들어온 매서인에게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는 지체없이 ‘도(道)를 행하기’(do the doctrine)로 결심하고 술과 놀음을 끊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때는 1899년으로 이미 고랑포에는 자그마한 남감리교회 예배당이 있었다. 술친구와 놀음친구가 없어졌으나 예수님이란 새 친구가 생겼으니 외롭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은 후 그는 지게질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힘은 들었지만 자기 힘으로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것이 기뻤다. 아내와 딸도 변화된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가족 전부가 고랑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약간의 돈을 마련한 그는 건어물 장사를 시작했다. 건어물을 지게에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팔았다.  
이덕수가 처음 믿을 당시의 쪽 복음
그런데 그는 세상적인 장사꾼이 아니고 사람낚는 어부를 겸하고 있었다. 며칠씩 인근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다가 물건이 떨어지면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그 때마다 그 아내는 보따리를 목에 걸어주었다. 그 보따리에는 쪽복음과 찬미가 그리고 기독교 서적들이 들어있었다. 책을 팔며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힘차게 전파했다. 곧 이덕수는 ‘예수님의 도를 행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얼마 후 이덕수는 속장이 되었다. 당시 속장은 지금의 속장과 달라서 거의 전도인의 역할을 하는 직책이었다. 장사도 잘 되어 그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을 장만하고 넓은 땅도 마련하였다. 주님의 일에 힘쓰니 물질적 축복이 넘쳐났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바빠졌지만 그는 주님의 일이라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계삭회나 꼭 참석해야하는 교회행사에는 100리를 멀다하지 않고 걸어 다녔다. 이덕수의 소문은 곧 선교사들의 귀에 들리게 되었다. 마침 처녀 선교지였던 춘천에 선교여행을 떠나던 무스가 이덕수를 찾아가서 함께 전도하자고 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렀던 무스는 반드시 한국인 한 사람과 동행해야 했다. 이덕수는 무스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무스와 이덕수는 함께 서울에서 춘천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무스는 자전거를 타고, 이덕수는 괴나리봇짐을 만들었다. 괴나리봇짐 안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경과 찬송을 전도 소책자를 잔뜩 실었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거리가 좀 먼 거리인가. 평지에서는 무스가 이덕수를 뒤에 태우고 달렸다. 그러다가 언덕이 나타나면 이덕수가 내려 뒤에서 자전거를 밀었다. 이렇게 조금씩 춘천을 향해 나아갔다.
이덕수와 무스는 춘천으로 가는 도중 어떤 마을에 들어섰다. 곧 소문이 퍼졌다. 코 큰 선교사와 ‘스스로 움직이게 기계’인 자전거를 보려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그 때까지 한번도 서양사람과 자전거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덕수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이것 보시요, 내 말 좀 들어보시오”하고 주위를 집중하게 한 후 키가 훤칠하게 컸던 이덕수는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전도를 시작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모였던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말의 뜻을 금방 이해했다. 실제로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군중 속에 귀를 기울이던 무거운 짐을 진 지게꾼들은 “무거운 짐”을 쉽게 이해했다. 남편과 시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아낙네도 그랬고, 마침 동생을 업고 구경 나온 계집애까지 무거운 짐을 쉽게 이해했다. 바로 그들이 그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수는 예수를 믿으면 그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다고 전도했다. 예수를 믿으면 무거운 짐을 덜고 편히 쉴 수 있다니 사람들이 귀가 솔깃해졌다. 이 얼마나 적절한 설교인가. 옆에 있던 무스가 탄복하였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설교가라고 생각했다.  
▲ 전도사 이덕수의 묘비.
함께 여행하면서 무스는 전도자로서 이덕수의 소양과 헌신적인 유심히 지켜보았다. 새로 전도의 불길이 타오르는 이 지역 전도자로는 이 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덕수에게 고랑포의 집과 재산을 정리하고 춘천에 와서 복음을 전하자고 제안했다. 전도자로서의 그의 월급은 고랑포에서의 그의 안정된 생활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이덕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특권과 기쁨을 생각하면 그가 누리는 경제적 안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결정했으니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춘천에 머무를 집 한 채를 구했다. 춘천읍내 봉의산 남쪽 산자락에 있는 봉의동에 있는 4간짜리 초가집이었다. 고랑포의 지게꾼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친구들이 나서서 이삿짐을 지게에 싣고 고랑포에서 춘천까지 옮겨주었다. 착한 그의 아내는 어린 딸을 업고 따라왔다. 이렇게 해서 이덕수는 춘천에 정착한 최초의 한국인 사역자가 되었다. 이 때가 1902년경이다. 이렇게 죽도록 충성하다가 이덕수는 남감리교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았고, 1909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선교사들은 그의 소천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의 무덤은 그가 살던 봉의동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1970년대 신동면 학곡리에 교회묘지를 조성하면서 옮겨졌다. 이덕수를 중심으로 한국인 사역자들이 춘천을 중심으로 그 선교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1904년에는 교회수가 많아져 춘천순회구역(Circuit)를 조직하고 무스를 구역장으로 파송하였다. 춘천순회구역은 1905년에 이르러 홍천을 넘어 원주에까지 이르러 원주에 남감리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선교구역이 확대되었다. 당시 원주는 1,000호가 넘는 큰 도시였고, 홍천도 춘천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춘천은 강원도 수도였지만 300호에 불과한 작은 도시였다. 계속해서 1907년 에는 선교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1906년 무스가 안식년으로 일시적으로 귀국하자 빈 자리를 콜리어(C.T.Collyer)가 맡게 되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춘천순회구역은 강원도뿐 아니라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분도 포함될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교회수(Societies)만도 75개나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 해인 북장로회와 선교구역 협정이 마무리 되어 원주는 북장로교회에 넘겨주게 됨으로 남감리교회의 춘천선교는 춘천을 중심으로 원주이북으로 축소되었다. 1908년 춘천에는 선교사 주택을 마련하고 무스가 이사옴으로 춘천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김진형 목사 (예산지방 죽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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