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목사님 딸 메르켈의 가뿐한 하산길

달무리지는 2021. 3. 14. 03:56

하산길도 가뿐한 메르켈

[중앙선데이] 입력 2021.03.13 00:28 |

한경환 총괄 에디터

 

등산보다는 하산이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하산길이 매우 가뿐한 지도자가 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무티(Mutti·엄마) 리더십’으로 독일을 이끌어 온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메르켈은 오는 9월 26일로 예정된 독일 총선에 집권 기민당 총리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고 2년 전 밝힌 바 있다.
 

15년 총리 재임 내내 ‘엄마 리더십’ 각광
문 대통령 남은 임기, 취임사처럼 되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메르켈의 지지율은 여전히 매우 높은 편이다. RTL이 지난달 실시한 포르자 여론조사에서 메르켈은 현재 독일 정치인 가운데 선호도 랭킹 1위를 차지했다. 곧 물러날 메르켈의 인기는 새 기민당 대표로 선출된 아르민 라셰트, 마르쿠스 죄더 바이에른 주지사 겸 기사당 대표 등 가을 총선 기민·기사연합 총리 후보군이나 올라프 숄츠 사민당 총리 후보 등 차기 주자들보다 앞섰다.
 
메르켈은 재임 중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난민사태, 브렉시트, 코로나19 등을 겪으면서도 정치 노선과 관계없이 실용적·포용적 리더십을 발휘해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말에 남편과 직접 장을 보는 등 검박한 일상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어느덧 1년 남짓 남았다. 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40% 안팎으로 전임 대통령들보다 견고한 편이다. 하지만 그 앞에는 험난한 하산길이 놓여 있다.
 
지난 4년 동안 문 대통령의 청와대와 정부는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장할 때가 많았다. 정권에 불리한 울산시장 선거 공작을 덮거나, 공약을 내세워 월성 1호기 경제성을 조작한 의혹을 받고 있다. 지독한 편 가르기, 독단적인 입법 같은 반민주적 행태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우리는 이 정부 들어 대통령에게 직언하기보다는 충성심만 내세워 승승장구한 참모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과 능력보다는 줄 서는 기술이 더 강조됐다. 정말 제대로 된 LH 사장이었다면 직원들의 말도 안 되는 일탈을 그대로 내버려 뒀을까.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워진 탓 아닐까. 이런 풍토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한 번만 생각해 봐도 명백하다. 주요 사안마다 밤새워 참모들과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해 상대방을 집요하게 설득한 메르켈(『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 책담)과는 대조적이다.
 
메르켈 총리는 재임 15년 동안 한 번도 정치적 라이벌들을 적폐청산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선거에 욕심을 내 가덕도 신공항 같은 뜬금없는 세금 퍼붓기로 국고를 탕진하려 들지도 않았다. 검찰을 개혁한답시고 제멋대로 난도질하지도 않았다. 코로나19 와중에 방역이나 민생과 관계없는 정치적 행위와 정책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취임 첫날(2017년 5월 10일) 행보는 진영을 떠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멋들어진 취임사와 함께 낮은 자세로 정치권·언론·국민과 소탈하게 소통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러나 그날뿐이었다. 이 정부 들어 공정은 곧 불공정을 의미했다. 통합과 공존 대신 분열과 유아독존이 판을 쳤다.
 
남은 1년 임기 동안만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취임사 다짐처럼만 하면 된다. 메르켈 총리의 ‘아름다울’ 퇴장이 우리에게도 찾아오길 기대해본다. 그러기 위해선 극적인 대반전이 필요하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대부분은 퇴임 후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데자뷔였다. 우리는 이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는 비극을 지금, 여기서 끝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