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고전
서양인의 중국 찾기 (진나라에서 차이나)
달무리지는
2021. 5. 14. 09:32
서양인의 중국 찾기
예전에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여행하던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수도가 있던 장안(長安·오늘날 西安)이 종착역과 같았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한반도와 일본에 도달했겠지만, 그것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난 지선(支線)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레스·신·마친 등 다양하게 불려
마르코 폴로 이후 ‘카타이’ 대세
중국 남부지역은 ‘만지’라고 표기
‘하나의 중국’은 그들만의 말일 뿐
역사적으로 서방 사람들이 중국을 가리키던 명칭은 여러 개 있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중국(中國)’은 사실 과거 중국인이 자신들의 나라가 천하의 한가운데 있다고 여겨 사용한 자존·자긍의 표현에 불과했다. 그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한 한자 문화권에서만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을 뿐 객관적인 명칭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대동(大東)’이니 ‘대화(大和)’와 같이 자존감이 깃든 용어를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은 동방에서 비단을 생산하는 지역을 ‘세레스(Seres)’라고 불렀다. 당시 중국이 비단의 생산지였기 때문에 세레스가 곧 중국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엄격하게 말해 고대 유럽인에게 세레스는 머나먼 동방의 어느 곳에 있는 ‘비단의 나라’ 정도였을 뿐이다. 그때까지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갖지 못했다.
‘차이나’는 첫 통일왕조 ‘진’에서 비롯
이에 비해 보다 널리, 또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 있다. 바로 ‘차이나(China)’인데,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Chin)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서아시아에서는 아랍 문자로 ‘ㅊ’를 표기할 수 없어 ‘신(Sin)’이라고 했고, 인도에서는 ‘크다’는 뜻의 접두어 ‘마(ma)’를 붙여 ‘마친(Machin)’이라고도 불렀다. ‘친’이라는 명칭보다 그리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친’ 못지않게 널리 사용된 중국의 명칭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키타이’이다. 이 말은 원래 중국 북부를 정복하고 요(遼·916~1125)라는 왕조를 세운 거란족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종족의 명칭은 그들 발음으로 ‘키탄(Kitan)’인데, 한자로는 ‘契丹(계단)’이라 표기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키탄’이라는 말이 ‘키타이(Kitai)’로 변음됐고, 모음동화로 인해 ‘카타이(Katai·Cathay)’라는 발음으로도 알려졌다. ‘캐세이 퍼시픽’이라는 항공사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키타이·카타이 명칭이 특히 유럽인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마르코 폴로의 역할이 크다. 그가 동방에서 겪은 체험을 구술한 『동방견문록』(1300년경)에 카타이(Catai)라는 지방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코 폴로의 책 어디를 봐도 중국이라는 나라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부르는 명칭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불렀고, 남중국은 ‘만지(Manzi)’라고 칭했다. 만지는 북방 사람들이 남쪽 주민을 ‘만자(蠻子·야만인)’라고 비하해 부르던 표현이었다. 이렇게 별도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중국이 북방의 금(金)과 남방의 송(宋)으로 오랫동안 분열됐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인이나 외국인의 눈에 하나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나타내는 명칭도 필요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이후 유럽인의 세계관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현존하는 필사본만 120종에 가깝고, 인쇄술이 도입된 뒤로는 활자본 280여 종이 출간될 정도였다. 그의 글이 나온 지 반세기쯤 지난 뒤인 14세기 중후반이 되면 『맨더빌 경의 여행기』와 같은 일종의 유사품이 만들어져 오히려 원작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1375년에는 ‘카탈루냐 지도’가 제작됐는데 『동방견문록』에 보이는 동방의 세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반영돼 있다. 이들 글과 지도에는 모두 ‘카타이’라는 명칭이 부각돼 있다.
몽골제국이 붕괴되고 한인들이 건설한 명나라가 들어선 뒤 드디어 중국은 하나로 통일됐다. 키타이와 만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고, 자연히 중국에서는 키타이 혹은 카타이라는 말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그러한 명칭이 여전히 사용됐다. 15세기 전반 티무르 제국의 사신이 명나라를 다녀온 뒤 남긴 여행기에는 여전히 중국을 가리켜 ‘키타이’라고 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 오늘날 러시아어로 중국을 ‘키타이(Kitai)’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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