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침략에 분개한 쇼팽
러시아의 침략에 분개한 쇼팽, 조국을 향한 격정을 음악에 담다
바르샤바 함락에 끓어오르는 분노 담아 ‘혁명’ 부제 에튀드 작곡
파리서 숨지자 “마음은 폴란드인, 재능은 세계시민” 기사 실려
유언에 따라 심장은 고국 폴란드에… 수도 공항은 쇼팽으로 명명
빈을 떠난 쇼팽은 린츠, 잘츠부르크, 뮌헨을 거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쇼팽은 조국의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받는다. 러시아 군대가 바르샤바를 장악하여 도시를 방화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참담한 심정의 쇼팽은 1831년 9월, 호텔 방에서 일기를 쓰는데, 사후에 출판되어 ‘슈투트가르트 일기’로 알려진 글이다.
“오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존재하시면서 복수해주지 않으십니까! 러시아인들의 만행이 아직도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하느님 당신이 러시아인입니까? 아버지는 노년에 빵조차 사지 못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이미 죽은 딸의 무덤을 러시아군이 짓밟은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누이들은 이미 겁탈당했을지 모릅니다. 러시아인들이 시민들을 목 졸라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맨손으로 한숨만 쉬면서 절망감을 피아노에 두드려대고 있습니다. 하느님, 땅을 흔들어 이 땅을 삼키소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지 않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잔인한 고초를 받게 하소서….” 그러고 쇼팽은 호텔 방에서 조국을 향해 끓어오르는 격정을 ‘혁명’이라는 부제를 단 에튀드(연습곡) c단조(작품 번호 10-12)로 작곡한다.
파리로 간 쇼팽은 그곳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파리의 모든 피아니스트를 굴복시켜, 파리 전체가 그의 연주에 넋을 잃었다. 그는 파리의 최고 명사가 되고, 낭만주의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지금도 따라다니는 그의 연애 이야기는 모두 생략한다. 그런 흥밋거리 일화가 우리가 쇼팽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해왔다. 그보다는 그의 음악 속에 언제나 존재했던 사랑하는 조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주목하자. 파리에서 그와 친분을 나누었던 리스트는 “보통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거나 고백하는 말을 그는 음악으로 쏟아냈다”고 말했다.
파리에서 병을 얻은 쇼팽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39세에 숨을 거둔다. 평생 파리에서 작곡하고 파리에서 연주하다가 파리에서 죽었지만, 그의 부고를 실은 폴란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태생은 바르샤바고, 마음은 폴란드인이며, 재능에 관해서는 세계시민인 쇼팽은….” 죽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나의 불쌍한 어머니”였다. 파리에서 장례식이 끝나자, 유언에 따라 심장이 도려내졌다. 심장은 주인을 대신하여 조국으로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시대와 조국을 외면한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술은 아름다운 레이스나 화려한 벨벳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은 폭탄과 화염 속에서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쇼팽의 애국심을 알기에 폴란드 정부는 나라 관문을 ‘바르샤바 프레데리크 쇼팽 공항’으로 명명하였다.
당시와 무척이나 닮은 일이 폴란드의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다. 쇼팽을 계승하는 20세기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들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 블라디미르 호로비치, 에밀 길렐스 등을 지금도 간혹 러시아 사람으로 알지만, 그들은 모두 조국이 짓밟힌 우크라이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