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 자기 이미지 아닌 실체를 사랑해야, 이미지와 실체를 구별해야
나르시시즘은 흔히 타인을 도외시한 채 자기 자신에게만 도취되는 경향을 뜻한다. 나르시시즘의 주인공인 나르시스(나르키소스·Ν]ρκισσοζ·Narcissus) 이야기가 비교적 완결된 스토리로서 등장하는 것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다. ‘변신’ 제3장에 너무 잘생긴 나머지 눈이 한껏 높아져 버린 미소년, 눈이 높아진 나머지 자신을 짝사랑하는 에코를 무시했던 미소년, 타인의 사랑에 냉담했던 미소년, 그러다가 결국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해버린, 그 결과 죽어버린 비극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좀 더 면밀하게 ‘변신’을 읽어보면, 나르시스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나르시시즘과는 거리가 있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된 나머지 손을 뻗어 그 대상에게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물에 손이 닿을 때마다 생기는 파동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결국 ‘변신’에 나온 나르시스 이야기의 핵심은 실체가 아닌 허상을 사랑하는 일의 고통이다. 허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랑이 강렬해도, 혹은 그 사랑이 강렬하기 때문에, 끝내 충족감을 얻을 수 없다. 갈증을 달래기 위해 샘을 찾은 나르시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더 심각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죽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 아닌 자기 이미지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허망한 일이라는 메시지,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를 사랑해야 된다는 메시지, 이미지와 실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만 사랑했던 존재로서만 나르시스를 규정하는 일은 너무 가혹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어디에도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미소년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아차렸다는 말은 없다. 나르시스는 끝까지 그 미소년이 타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고 여겨진 존재)을 사랑하다가 죽은 것이다. ‘변신’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타인에게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 세상 많은 연인들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