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고전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_후춧가루 쫓다 세계사 바꾼 콜럼버스

달무리지는 2023. 1. 8. 20:33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_후춧가루 쫓다 세계사 바꾼 콜럼버스

오늘도해피데이 2022. 12. 21. 12:59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밟은 콜럼버스, 1862, 디오스코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 /위키피디아

◇금가루보다 비쌌던 고대의 후춧가루

후추 등 향신료는 경제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발, 마젤란의 세계 일주 등이 모두 인도의 후추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무렵 동양의 향신료가 부의 원천이었다.

◇후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서구에 알려져

후추. /위키피디아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후추와 정향 등 많은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330년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시리아, 터키, 페르시아, 인더스강 유역까지 정복하여 동양의 향신료가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원정 때 친구인 식물학자를 대동하여 점령지의 많은 향신료를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부터다. 인도에서 무역풍을 타고 인도양을 건너 홍해를 북상하여 이집트에 도달하는 항로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후추는 실크로드와 바닷길로 상업 중심지인 호르무즈나 아덴에 옮겨진 뒤 그곳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베네치아로 운송되었다. 당시 후추는 굉장히 비쌌다. 실제로 후추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같은 무게의 금과 가격이 같았다. 1세기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후추같이 영양도 없는 것 때문에 매년 5,000만 세스루티우스의 돈을 유출하고 있다”고 개탄할 정도로 후추는 비쌌다.

◇후추 수입에 성공하면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다

후추는 열대성 식물이라 유럽에서는 재배가 어려워 동서무역 하는 대상들로부터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후추는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져 순은 항아리에 넣어 소중하게 다루었다. 중세 게르만 사회에서는 세금 납부나 관료 급료, 땅 매매나 임대, 결혼 지참금 등에 후추가 쓰였다. 당시 인도에서 후추를 싣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선원들은 고향에서 영웅이 되고 항해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유럽인들이 비싼 후추에 열광한 이유

유럽 사람들은 왜 비싼 향신료를 그토록 선호했는지를 보자.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소금에 절인 고기와 생선 그리고 빵이 주식이었다. 염장식품에 신물이 난 귀족과 세도가들은 후춧가루를 뿌린 신선한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또 짜고 맛없는 음식에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넣으면 맛이 좋아졌다. 그래서 동방의 향신료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비린내를 제거하고 육류를 저장하는데도 향신료를 사용했다. 하지만 향신료 가치는 단지 음식의 맛을 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성욕을 돋우는 강장제와 의약품으로 믿어져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특히 전염병을 예방하는 살균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귀족들과 부유층들이 앞다투어 샀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주도한 중세 후추 교역

중세 들어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면서 유럽과 동양을 잇는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단절시킨 뒤부터 향신료는 아랍 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가격이 오르고 거기에다 술탄이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여 더욱 비싸졌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지했다. 이 통에 베네치아의 유대인 상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후추를 사들여 막대한 이윤을 붙여 유럽에 팔았다. 그러다 보니 후추의 최종 소비자가격은 금가루보다 비쌌다. 귀하다 보니 은 대신 화폐로 통용된 때도 있었다. 이쯤 되자 후춧가루는 베네치아 공국을 제외하고 유럽 각국에서 고대 소금같이 왕실 전매품이 되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주로 이슬람 지역 유대 상인들과 독점 거래를 했다. 12세기 바그다드에는 4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무역업에 종사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그들에게 모직물을 팔고 그 돈에 은을 보태어 향신료를 샀다. 일부는 호르무즈나 아덴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직접 향신료를 사서 바그다드를 지나 흑해 남부 해안을 경유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했다. 이후 향신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뱃길로 베네치아로 운반되었다. 나중에는 이슬람 내 향신료 유통의 주도권이 이집트의 카라미 상인들에게 넘어가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도 향신료 수송을 전담하는 갤리 상선단을 매년 정기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로 파견함으로써 지중해 향신료 교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이어갔다.

◇유대인의 환어음, 귀금속 부족을 보충하다

베네치아가 동양에서 향신료, 비단, 면직물 등을 많이 수입해오는 한편 모직물을 제외하곤 동양에 팔 마땅한 물품이 없었다. 13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도시들이 금화 주조를 재개했음에도 유럽의 금과 은만으로는 늘어나는 교역량을 결제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실물화폐 없이도 거래를 청산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바로 환어음이었다. 이는 베네치아와 이슬람 양 지역의 유대 상인 간의 신용거래였기에 가능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는 탈무드라는 국제법이 규율하고 있어 신뢰와 신용이 생명이었다. 이후 환어음은 실물화폐의 부족분을 메우는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상품거래를 더욱 원활하게 만들었다.

환어음은 발행인이 수취인에게 일정 금액을 빌리고, 합의한 기한에 발행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하여금 환어음 소지자에게 빌린 돈을 지불하겠다는 일종의 지불 명령서이다. 두 지역 간의 거래에 실물화폐 대신 환어음이라는 종이 서류로 거래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환어음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금화나 은화를 직접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환어음을 발행하려면 여러 시장에 사업 조직과 거래처가 있어야 했다. 이런 연유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상업망을 가지고 있었던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환어음 거래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5세기 초 베네치아 무역의 근간인 후추 교역액이 30만 두카토에 달했다. 금 3.56g을 함유한 두카토 금화가 당시 국제 기축통화였다. 이슬람 세계와의 무역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두카토로 지불했고 이슬람 상인들을 인도양에서 향신료를 구입할 때 베네치아 두카토로 결제했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에도 인도와 동남아시아 향신료 생산지들에서 베네치아 두카토가 발굴되곤 한다. 15세기 말 중세가 끝날 때까지 400년 동안 모든 향신료 무역은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져 전 유럽의 무역업자들이 향신료를 사기 위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의 독점으로 다른 나라 상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 특히 바닷길 개척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바꾼 대항해 시작되다

14세기 초 무역을 중시해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元)나라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튀르크족이 오스만제국을 건국해 동서무역에 끼어들어 무역로를 차단하자 향신료 가격이 폭등했다. 1453년 이들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함락해 더 이상 후추를 구입할 수 없게 된 기독교 상인들에게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 개척이 절실했다.

향신료 무역을 이슬람을 통하지 않고 직접 시도한 것이 15세기 말 포르투갈과 스 페인의 대항해 시도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 촉발제였다. 이 책에 향신료 산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중국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는 대목에서 유럽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황금과 후추가 흔하다니 탐험가들의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향신료 획득 경쟁은 결국 항로를 동쪽으로 향한 포르투갈이 서쪽으로 향한 스페인을 이기고 무역권을 독점하게 된다. 대신 항로를 잘못 잡은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했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은 콜럼버스

지금도 유대인이란 가설이 끊이질 않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유대인 선원들과 함께 신대륙을 발견했다. 콜럼버스는 제노바 근처 사보나에서 모직물 무역상 도메니코 콜론과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제노바 사람이었으나 이탈리아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도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무렵 모직물 무역상은 대대로 유대인의 직업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영어식 이름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콜론(Colon)이다. 당시 ‘콜론’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했던 이름으로 그 스스로도 다윗 왕과 관련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최근 유대 연구가들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1391년~1492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중세인은 지구가 평평해서 먼 바다로 나가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위키피디아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을 가져 10대부터 아버지를 도와 직물·포도주 매매를 위해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항해했다. 1474년 에게해 키오스섬에 유향을 사러 가는 항해에도 참가했고, 20대에는 마데이라섬으로 설탕 사러 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콜럼버스는 이미 아이슬란드, 마데이라, 영국, 아프리카 가나를 오가는 해상무역상이었다. 그는 제노바의 상선대 선장이 된 뒤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의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오면 그 옆에 메모할 정도로 탐독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친서를 받아 1492년 대칸이 지배하는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콜럼버스가 찾아가려던 ‘인도’가 우리가 아는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가 휴대한 친서의 수신인은 ‘인도’를 지배하는 몽골의 ‘위대한 칸’이었다. 그는 자기가 도착한 곳이 대칸이 통치하는 대륙에서 아주 가까운 섬이며, 근처에는 은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된 ‘지팡구’ 곧 일본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려서부터 선원 생활로 잔뼈가 굵은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 저 멀리로 돌아가면 인도와 지팡구에 도달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지팡구(Zipangu)란 ‘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인데, JAPAN이라는 명칭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유대인이 만든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

1375년 아브라함 크레스쿠 지도 자료사진. /서현우

당시 유대인 수학자나 과학자는 남들보다 1세기 먼저 지도와 나침반을 만들어 먼바다 항해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마르코 폴로의 글이 유럽인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1375년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제작된 카탈란 지도(Catalan Atlas)이다. 이는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동방견문록’에 의해 처음 알려진 지명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는 동방 세계에 4장을 할애했다. 동방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도와 나침반의 스승’으로 불린 유대인 아브라함 크레스쿠가 바로 이 지도를 만들었다. 이후 이 지도는 항해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의 아들 자코모 드 마조르카 또한 ‘지도의 유대인’이라고 불리며 사그레섬 해상 관측소 소장으로 일했다.

◇콜럼버스, 풍운의 꿈을 안고 리스본으로 가다

콜럼버스는 1479년 결혼했는데, 그 무렵 피렌체의 의사이자 지리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면 향신료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는 항해계획서를 포르투갈 교회지도자 마린스를 통해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전달했으나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는 1481년 포르투갈 왕에게 자신이 직접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대항해의 꿈을 품고 제노바를 떠나 포르투갈에서 지도 제작소를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를 찾기 위해 당시 ‘지구의 끝’이라고 불리는 리스본으로 갔다. 실제 유럽 사람들은 리스본 위에 위치한 ‘Cabo da Roca’라는 곳을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지구 끝에 다녀갔다는 증명서를 유려한 고어체로 발급해 관광객들한테 팔고 있다.

콜럼버스가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돈 많은 유대인들이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빼곡히 지도 제작소들을 차려 놓고 있었다. 콜럼버스도 그 한편에 ‘콜럼버스 지도 제작소’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모험가들은 인도항로 개척을 위해 희망봉을 돌아가는 방법을 시도했는데 번번이 장애물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생각은 달랐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계속 항해하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언젠가는 인도에 닿으리라 판단했다. 이후 그는 포르투갈의 후앙 2세와 스페인의 공동 왕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의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부되었다.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다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위키피디아

장장 17년간을 돈줄을 찿아 헤매던 콜럼버스가 우여곡절 끝에 여왕과 잘 아는 팔로스항의 수도원장 마르티나 신부의 주선으로, 1486년 1월 이사벨 여왕을 처음 알현해 탐험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대칸의 나라(원나라)’ 를 찾아가겠다는 이 계획은 특별 심사위원회에 올려졌으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무렵 스페인은 이슬람과 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당시 사령부 겸 임시 궁전이던 코르도바 성으로 불렀다.

◇음양으로 도움 준 유대인들

당시 궁전에는 3인의 마리노 곧 개종 유대인들이 있었다. 궁정 유대인 가브리엘 산체스, 시종 J. 가브레로,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사벨 여왕에게 왕실 재정 사정이 궁핍함을 설명하고 만일 콜럼버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거대한 부를 거둘 수 있다고 권했다. 당시 유럽에는 왕실 내에 ‘궁정 유대인(Court Jew)’이란 특이한 직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이 워낙에 재정 관리와 금융 섭외에 유능했기 때문이다. 궁정 유대인은 오늘날의 재무장관 격이었다.

산타마리아 호. /위키피디아

여왕은 콜럼버스의 요구가 많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자신이 탐험 비용을 부담해도 좋다는 발언에 자극받은 여왕이 결국 그를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 콜럼버스는 여왕과 산타페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세습권을 가진 제독이 되었고, 그가 개척할 식민지의 총독이 되었으며, 개척한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을 소유할 자격을 얻었다. 여왕의 명을 받은 조세관리관이 항해 비용에 충분한 1만7천 대랏트를 콜럼버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사벨 여왕은 자금 제공 외에도 팔로스 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을 내주게 하고, 대항해를 기피하는 승무원 모집에도 과거의 죄를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선원들을 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했다. 드디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라아호을 중심으로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스페인 팔로스항을 떠나 인도로 출발했다.

당시 콜럼버스의 항해를 적극 지지했던 여왕의 재정담당관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으며 궁정의 후원자들은 주로 이러한 개종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일했던 선원은 물론 통역관, 지도제작자, 항해기구 제작자 등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이렇듯 콜럼버스의 대항해에는 음양으로 유대인 과학자들과 선원들의 도움이 컸다.

◇남반구 항해를 가능케 해 대항해 시대를 연 유대인의 ‘천측력(天測曆)’

그 무렵 항해가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탐험했는데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면 대략의 위도(latitude)를 구할 수 있었다. 경도(longitude)는 연안을 따라 항해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위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 또는 남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경도는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 또는 서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위치이다. 그러나 남반구로 내려가면 북극성을 볼 수 없어 위도를 구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랍비이며 천문학자이자 콜럼버스의 멘토인 아브라함 자쿠토였다. 그는 콜럼버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인물이다. 자쿠토는 유대교 신비주의 경전 ‘조하르’를 읽고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곧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 위도와 태양의 적위(Declination)를 계산해 놓은 <천측력>을 히브리어로 간행했다. 이로써 북극성 없이도 위도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남반구 항해가 가능해졌다.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던 해 3월에 이사벨 여왕은 유대인 추방칙령을 내렸다. 당시 이렇게 추방당한 사람 중에 유대인 천문학자 자쿠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로 건너가 포르투갈 왕실 천문학자가 되었다. 자쿠토는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를 설득해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는 데 일조했다. 콜럼버스는 자쿠토가 작성한 항해 지도를 썼고, 유대인 요세프 베치뇨가 개발한 항해기구를 사용했으며, 통역관이었던 루이스 데 토레스도 랍비 출신으로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본 프랑스 학자 샤르르 드 라 론시에르는 ‘이들 중세 유대인 과학자, 지도제작자, 천문학자들이 ‘아프리카를 도는 항해에서 신대륙 발견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발견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난관은 선원 모집이었다. 저 넓은 바다 끝에 가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는 공포감 때문에 배를 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콜럼버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선원들이 채워졌다. 선원의 4분의 1은 승선을 조건으로 사면받은 죄수들이었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에 탑승한 선원 중 우수한 뱃사람, 독도사, 통역, 외과의사 등 중요 스탭진은 유대인들이었다. 콜럼버스가 이런 유대인들을 만났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어쨌든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한 팀이 되어 거친 대서양을 횡단하여 1492년 10월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