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3국 - 친 러시아 주민과의 갈등 - 우리 진보 보수 갈등은 애교
핀란드의 관문공항인 헬싱키 국제공항에 들어서면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위한 안내소와 함께 우크라이나 국기 포스터를 볼 수 있다. 40분 가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린 헬싱키 중앙역 건물 전면에는 우크라이나 깃발이 높이 걸려 있었다. 여객선을 타고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도착할 때까지도 노란색과 파란색 깃발의 물결은 계속 이어졌다. 탈린 시청 맞은 편 건물에는 에스토니아 국기와 우크라이나 국기를 합성한 벽화가 전면에 그려져 있다. 헬싱키와 탈린에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만큼이나 많은 우크라이나 깃발이 있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시청 맞은 편 건물에 우크라이나와 에스토니아 국기를 합성한 벽화가 걸려 있다. 탈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탈린의 한 카페에서 지난 7일(현지시간) 만난 헬리나 필라토바(44)도 가방에 에스토니아 국기와 우크라이나 국기를 교차해 만든 배지를 달고 왔다. 헬리나에게 1년 가까이 진행되는 전쟁을 지켜보는 심정을 묻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국인 에스토니아에서 전쟁이 터질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헬리나와 함께 만난 마아리 힌스베르그(28)는 “에스토니아 독립기념일에 전쟁이 터져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2월24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했다. 1991년 8월 25일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두고서는 ‘재독립’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주년과 맞물린 올해 독립기념일 기념식에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참석했다.
헬리나와 마아리는 유창한 영어로 전쟁을 계속하는 러시아를 성토했다. 평화협상, 중재 등을 말하는 서유럽 지도자들에게도 날을 세웠다. 헬리나는 “러시아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얻어간다면 다음에는 우크라이나 영토 전체를 원할 것이고, 결국 우크라이나는 벨라루스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아리는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을 이따금씩 언급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두고 “그렇게 푸틴을 만족시키고 싶다면 차라리 남프랑스 땅을 떼 주라. 그러면 푸틴이 훨씬 더 만족할 것 아닌가”라고 비꼬았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인구 133만명의 에스토니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후 러시아에 대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인 국가이다. 킬 세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지난해 11월 기준 우크라이나에 3억3000만 유로(약4622억원)의 군사 지원을 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우크라이나 지원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올해 자국의 국방예산도 1년 전보다 42% 증액했다. 헬리나와 마아리의 러시아에 대한 성토도, 탈린 거리 곳곳의 우크라이나 국기 물결도, 에스토니아 정부의 지원과 강경한 태도가 위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들끓는 분노와 불안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했다.
헬리나가 “러시아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자신과 부모 세대가 겪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헬리나는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벙커 대피를 비롯해 군사 훈련을 했던 것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고 했다. 마아리 역시 “어머니가 학창시절 칼라시니코프 소총 조립대회에서 1등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거 이력서에 써 먹었느냐고 농담도 했다”고 말했다.

엣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던 시절을 겪었던 헬리나(44·왼쪽)와 에스토니아 재독립 이후 태어난 마아리(28)가 7일(현지시간) 탈린 시내의 한 카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탈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1918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다. 소련군은 1944년 에스토니아 땅에서 나치 독일을 몰아냈지만 이후 에스토니아를 소련에 병합시켜버렸다. 탈린에는 각종 군사기지가 만들어졌다. 바다 건너 핀란드가 중립국을 선언했지만, 서방 편으로 돌아설 경우를 대비한 병력 배치였다. 에스토니아 국기 사용은 금지됐다.
2차 세계대전 시절 나치 독일을 몰아내기 위해 진입했던 소련 탱크는 1991년 탈린 도심에 다시 한 번 진입했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해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3국의 독립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였다.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당시 발트3국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독립 요구가 터져나왔다.
1988년 8월 발트 3국 사람들이 빌뉴스(리투아니아)~리가(라트비아)~탈린을 잇는 600㎞의 인간띠를 이어 노래를 부르는 시위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노래혁명’이다. 노래혁명 이후 독립 논의는 급물살을 탔고 급기야 에스토니아인들은 1991년 탈린의 방송국을 점령해 독립을 선언하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소련 정부가 탱크를 보낸 것이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탱크를 몸으로 막았다. “당시 저는 열두 살이었는데 부모님이 함께 데리고 나가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팔에 소름이 돋아요.”
헬리나 같은 12세 아이까지 나서 맨몸으로 소련 탱크를 막아 이룬 자유와 독립이었다. 에스토니아가 우크라이나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국방비 증액에 합의한 이유도 소련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막겠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에스토니아는 전쟁 기간 역설에 직면했다. 러시아가 불러온 동유럽의 안보 불안에 맞서기 위한 각종 조치들이 에스토니아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것이다. 에스토니아 당국은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선전)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방송 시청을 금지했다. 에스토니아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급작스럽게 TV를 빼앗긴 셈이 됐다.
에스토니아의 공공기관 안내판이나 도로 표지판, 음식점 키오스크 등은 에스토니아어, 영어, 러시아어 순으로 적혀 있다. 에스토니아인의 75%는 에스토니아어를, 나머지 25%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두 언어는 매우 달라서 따로 배워야만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나르바 등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접경도시에서는 입국자를 대상으로 소지품 검사 등을 강화하고 단속 인력을 늘리는 등 보안 수위를 높였다. 러시아 연계 간첩에 대한 경고 포스터도 나붙었다. 소련 시절 이주해 에스토니아인이 된 러시아계 주민들은 알게 모르게 의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르바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지난해 8월 나르바 국경에 2차 대전 승전을 기념해 전시한 소련 탱크를 철거했다. 군사 장비를 기념물로 전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이 이전부터 있었고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의견에 더욱 큰 힘을 실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반발이 커서 철거는 밤중에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반대하는 이들의 절반은 러시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지금의 러시아가 나쁘다고 해서 2차 대전 당시 나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영웅적 흔적을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에스토니아 나르바에서 2022년 8월17일 세계 2차 대전 승전을 기념해 전시한 소련 탱크의 철거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은 TV를 뺏기고, 의심스러운 눈초리의 대상이 됐으며, 자랑스러운 역사가 배척당한다는 불만을 갖게 됐다. 안보 위기가 불거지며 국가의 감시 힘이 집중되자 잠복된 민족갈등이 커질 여지가 생겨난 것이다.
헬리나 역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방송 금지 조치가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헬리나는 “러시아인 개개인을 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국영방송은 시민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반면 탈린에 사는 러시아계 주민인 알리나 스테포비코(23)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자신을 ‘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나르바에도 거주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러시아로 출퇴근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러시아 경제가 더 좋았다. 명절도 에스토니아인들과는 다르게 지냈다. 알리나는 차이콥스키 등 러시아의 역사적 거장들의 예술을 보이콧하는 조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는 “미국도 전쟁을 많이 일으켰지만, 미국 문화는 캔슬을 안 당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부모님 세대나 나르바의 친척들은 2차 대전 탱크 철거에도 서운함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인 알리나가 9일(현지시간) 탈린 시내의 한 카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탈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탈린에서 기차로 약 2시간 떨어진 나르바는 강 하나를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나르바는 전쟁 전에는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변방 국경도시가 됐다. 지난 8일 방문한 나르바는 도시 전체가 음산하고 쓸쓸한 분위기였다. 러시아와 나르바를 잇는 국경다리에서 에스토니아행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러시아행으로는 화물차가 이따금씩 다녔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친척 방문 등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국경을 완전히 폐쇄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러시아로 출퇴근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고 나르바의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경제적 선택지는 더욱 좁아졌다.
전쟁의 시대를 맞은 에스토니아는 지금 자유와 안보, 민주주의와 국민통합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보다 복잡하고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8일(현지시간) 에스토니아 나르바와 러시아 이반고로드를 잇는 국경 다리에 러시아 방향으로만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