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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회사 - 17세기 맨해튼에 식민지

달무리지는 2023. 4. 17. 01:57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맨해튼에 식민지를 세우다

입력 2023.04.16. 08:00업데이트 2023.04.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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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09년 맨해튼을 탐사하다

유대인들이 척박한 북부 저지대에서 소금 상권을 장악하여 절임청어 산업을 주도한 이래 채 100년도 안되어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암스테르담 은행 등 자본주의 씨앗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던 1609년에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이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무역을 위해 북극 항로를 개척하려고 노력하던 중 동인도회사의 ‘반달(Half Moon)’ 호를 이끌던 헨리 허드슨 선장에게 북극 항로 탐험 임무를 맡겼다. 그는 1609년 9월 아메리카 동부 연안에서 대구가 많이 잡히는 ‘케이프 콧’(Cape Cod)을 발견하고 그 아래 맨해튼 섬 옆의 서쪽 강이 혹시 북극으로 가는 항로일지 몰라 강을 따라 올버니까지 올라갔다. 맨해튼 서쪽을 끼고 흐르는 허드슨강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어퍼(Upper) 뉴욕만이 발견된 것은 1524년이나, 공식적으로 맨해튼 일대를 처음 탐험한 사람은 허드슨이었다.

그가 동인도회사에 보낸 보고서에서 ‘푸른 언덕으로 둘러싸인 훌륭한 항만과 위도상 아열대쯤에 속할 것 같은 이곳에 농경지로 이용될 수 있는 무한한 땅이 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인들이 맨해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명품 모피의 대명사 비버

최고급 모피, 비버. /위키피디아

이듬해 7월 네덜란드로 돌아온 반달 호는 비버 모피 등 아메리카 대륙 특산물을 가득 싣고 왔다. 그 무렵 비버 모피는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그래서 아메리카의 비버는 일찍부터 유럽 사냥꾼의 목표물이 되었다. 비버 가죽은 질기고 따뜻한 솜털이 달려 있어 좋은 모피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비버 가죽 모자는 당시 유럽의 대히트 상품이었다. 거기에다 비버로부터 귀한 해리향도 얻었다. 이는 비버가 봄에 짝짓기할 때 상대를 유인하려고 분비하는 강한 향을 지닌 물질로 고급 향수의 재료나 약재로 쓰였다. 담비가 시베리아 개척의 동인(動因)이었던 것처럼 비버는 서부 개척의 동인이 되었다. 비버에 눈독 들인 네덜란드 상인 중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619년 서인도회사에 독점 면허권을 주다

네덜란드 정부는 허드슨의 보고에 따라 함대를 보내 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탐험했고, 1619년 ‘서인도회사’(The Dutch West India Company)에게 북위 40~ 45도 사이의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에 대한 독점 면허권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에 동인도회사라는 식민회사를 둔 것처럼, 신대륙에는 서인도회사라는 식민기업을 두어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동인도회사와 마찬가지로 이 회사의 대주주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에 본거지를 둔 유대 상인이었다. 그리고 1621년에는 네덜란드 의회로부터 서아프리카를 포함한 서반구에서의 ‘운송과 무역에 관한 권리’ 곧 무역 독점권, 항해, 정복, 상업에 대한 특허를 인정받았다.

◇비버 모피 교역 위에 세워진 뉴암스테르담

그 무렵 맨해튼은 인디언들이 사는 숲으로 덮인 섬이었다. 서인도회사는 이곳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1625년에는 비버 모피 수집을 위해 ‘가죽거래교역소’를 세우고, 항구 ‘포트 암스테르담(Port Amsterdam)’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이때를 뉴욕이 탄생한 연도로 본다.

맨해튼 구입 장면을 기록한 그림. /위키피디아

이듬해 서인도회사 총독 피터 미누이트는 인디언들로부터 조가비 구슬, 장식용 유리구슬, 옷감, 주전자, 단검 등 불과 60길더 곧 24달러 상당의 물품을 주고 아예 맨해튼을 사 버렸다. 옮겨 다니며 사는 인디언들 생각에는 땅이란 누구나 자유로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데 굳이 소유권을 갖겠다는 백인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러 유용한 물건을 주니 그냥 좋았다. 이 역사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장소가 맨해튼 남단의 배터리 파크이다.

이후 서인도회사의 무역은 대략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먼저 네덜란드에서 실려 온 모직 천을 맨해튼에 사는 인디언들의 화폐인 조가비 구슬과 바꾸었다. 이 구슬을 가지고 허드슨강을 거슬러 올라가 포트 오렌지 지역 인디언들의 비버 가죽과 교환했다. 1626년 경우, 청색과 회색 모직 천 200매를 조가비 구슬로 바꿔 포트 오렌지로 올려보내면 비버 모피 1만 장과 바꿀 수 있었다.

가죽거래소가 세워지고 3년 뒤 1628년 거래소 성채 안 인구는 고작 270명이었다. 하지만 1624년부터 1632년까지 초기 8년 동안 서인도회사가 네덜란드로 선적한 목록을 보면, 비버 가죽은 첫해 1,500장에서 1만 5천장으로 열 배나 늘었다. 시가총액으로도 2만 8천 길드에서 14만 3천 길드로 거의 매년 64%씩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의 유래

1660년 로어 맨해튼 초기 모습.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인들은 고향의 수도를 기리며 이 섬을 네덜란드풍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배터리 파크를 중심으로 한 맨해튼 남단은 지금도 풍차나 벽돌로 만든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네덜란드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배터리 파크를 중심으로 한 맨해튼 남단은 지금도 풍차나 벽돌로 만든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네덜란드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 섬 남단에 위치한 그들의 식민지를 계획도시로 건설했다. 먼저 접안 시설을 갖춘 항구를 건설했으며 암스테르담처럼 항구와 연결된 운하를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 침략을 막기 위해 북쪽과 서쪽에 성벽을 쌓았으며 남쪽 끝에 해안방어를 위해 거대한 규모의 대포 포대(砲臺)를 구축했다. 지금의 ‘배터리 파크’ 명칭은 이때 만든 포대(Battery)에서 유래한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디언들이 사용했던 넓은(Broad) 도로 브로드웨이는 그대로 썼다. 한편 인디언과의 싸움도 치열했다. 교회나 도로의 건설이 진행되면서 인디언 습격을 막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 목책(wall)을 쌓았다. 1653년에는 영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맨해튼 남단에도 나무 목책을 세웠고, 1673년에는 인디언들의 습격이 계속되자 허드슨강에서 이스트까지 나무 목책으로 울타리를 쳐서 방어막을 넓혔다. 그 뒤 나무 목책이 세워진 거리와 인접한 거리를 ‘월스트리트’(Wall Street)라 불렀다.

◇조가비 구슬 화폐

당시 맨해튼의 인디언들은 비버 모피 대금을 칼, 도끼, 낚시바늘, 솥, 술, 총과 바꾸거나, 금은이 아닌 자신들 세계의 화폐인 조가비로 만든 구슬로 받았다. 금과 은은 유럽 사람들 눈에나 귀금속으로 보였을 뿐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금속조각이었다. 조가비 구슬은 동부의 강과 호수에서 자생하던 조가비 조개로 만들었다. 그 세공은 맨해튼 인근에 있는 지금의 뉴저지,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조개껍질을 여러 조각으로 부수어 그 조각들을 손으로 비비면 나중에는 매끈하고 윤이 났다. 특히 검은색을 띠는 구슬이 귀해 더 가치가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구슬은 단순한 장신구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왐품. /위키피디아

부족에 따라 구슬은 추장의 위세품이거나 신부의 결혼예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더 특수한 용도가 있었다. 바로 의사소통의 도구이자 기록의 매체로 쓰였다. 낱개로는 의미가 없고, 끈에 특정 패턴대로 꿰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이렇게 끈에 꿴 것을 왐품(wampum)이라 한다. 보통 360알을 꿰어 만든 것이 1왐품이다. 특정 재질과 색상의 염주를 특정 패턴으로 연결하면, 왐품은 스토리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부족 간의 동맹 기록이라든지, 전쟁의 구전역사를 왐품에 담았다. 이후 부족장이 왐품의 순서나 표면의 특정 흔적 등을 통해 기록들을 재생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왐품을 매개체로 한 인디언들과 미국 정부 사이의 조약이나 계약이 법적 효력을 발휘한 판례가 있다. 지금도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보면 ‘왐품’이 진열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 인디언들은 비버 가죽을 팔아 총과 화약을 사들였다. /위키피디아

변변한 자체 화폐가 없었던 식민지에서 조가비 구슬 화폐는 독립전쟁 전까지 스페인 은화 등 여러 종류의 주화와 어울려 비교적 오랜 기간 통용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조가비 구슬은 초창기에 강세통화였다. 흑색 구슬 한 줄(왐품)로 비버 가죽 다섯 장을 살 수 있었다. 곧 1626년 교환 비율은 ‘1흑색 왐품 = 2흰색 왐품 = 10길더 = 5비버 가죽’ 정도였다. 나중에는 짝퉁 구슬이 많이 유통되어 가치가 하락했다. 일부 인디언들은 비버 가죽을 팔아 총과 화약을 사들였다. 처음에 이 총은 비버 사냥에 사용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대량의 모피가 수집되었다.

◇북아메리카의 모피 사냥

허드슨강 초기 지도, 비버 분포지가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모피 사냥은 백인들이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모피 무역은 인디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역의 대가로 백인들로부터 받은 술과 무기는 생활을 변화시켰다. 인디언들끼리도 모피를 팔아 산 총으로 부족들 간에 모피 쟁탈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유행했던 비버가죽 모자; 장교와 웃는 소녀, 1657년. /위키피디아

모피 무역 덕분에 유럽 상인과 사냥꾼들이 인디언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냥감은 비버였다. 158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비버 가죽 모자가 대유행이었다. 한때 북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번성하던 비버는 극성스러운 사냥으로 1630년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상류사회 사람들은 반드시 비버 가죽 모자를 써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대륙 전체가 비버 가죽 붐이었다. 18세기 말 유럽이 북아메리카에서 수입한 비버 모피는 연평균 26만마리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