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향신료 전쟁 -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 - 약탈과 살육

달무리지는 2023. 5. 15. 06:42

약탈과 살육으로 마련된 자본주의 종잣돈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향신료 전쟁 ③

입력 2023.05.14. 08:00업데이트 2023.05.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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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으로 점철된 반다 학살

반다제도 모습. /위키피디아

그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수입의 56%는 후추가, 18%는 나머지 항신료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향신료가 주 수입원이었다. 이들은 쫓겨난 반다제도의 육두구를 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육두구는 후추 가격의 10배 이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반다제도를 장악하려는데 사활을 걸었다.

반다제도 네이라 섬에 건설된 네덜란드 나소 요새. /위키피디아

당시 영국인들이 반다제도 원주민들에게 탄약과 무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결국 네덜란드의 무력 앞에 굴복한 원주민들은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다제도 중심 지역인 네이라 섬에는 네덜란드 식민 지배의 상징인 ‘나소 요새’(Fort Nassau)가 건설되었다. 네이라 섬을 평정한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북쪽 테르나테 섬을 시작으로 말루쿠제도 일대 향신료 산지들을 차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테르나테 섬에 두 번째 요새인 ‘오란제 요새’(Fort Oranje)가 건설되어 1619년 바타비아가 만들어질 때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 역할을 했다.

반다 학살. /위키피디아

1616년 아이(Ai) 섬 점령 땐 네덜란드 군 외 일본인 용병 24명도 참여했다. 이때 학살된 400명 원주민 중엔 여성과 어린이가 상당했다.

현지 박물관에 걸려 있는 반다 학살 사건, 일본 사무라이 용병들의 원주민 살해 모습. /위키피디아

1616년부터 4년간 계속된 룬 섬 공방전은 처절했다. 영국군이 장악한 룬 섬은 무려 1540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점령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영국군의 재침범을 막기 위해 룬 섬의 모든 향신료 나무를 베어버렸다. 일종의 청야작전이었다. 1621년 2월 네덜란드인들은 1655명에 이르는 군인들과 19척의 전함을 이끌고 반다제도의 가장 큰섬인 반다베사르 섬으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용병으로 고용된 286명의 일본인 사무라이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영국군을 물리치고 5000여 원주민 대부분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야만적 침탈로 육두구를 독점 매매할 수 있었다. 이렇게 향신료에는 피의 역사가 함께 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곧 자본주의 종잣돈은 이렇게 대항해 시대의 무수한 약탈과 살육으로 마련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삼각무역에 주력하다

1619년에 자바섬에 첫 번째 식민거점 바타비아를 세운 네덜란드는 자바섬 서쪽의 수마트라섬을 침략했다. 바타비아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이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동쪽 향료섬 말루쿠제도를 빼앗은 후, 말라카와 실론까지 점령했다. 실론은 오늘날의 스리랑카이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인 점령으로 곳곳에 식민지를 세워 그곳에 무역관을 개설했다. 무역관들은 1607년 시암의 아유티아를 시발로 1609년 일본의 히라도(平戶), 1624년 대만의 포트 젤란디아, 1636년에 베트남, 1641년 데시마, 1644년 실론 등 약20 여 곳에 이르렀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삼각무역에 주력했다. 인도네시아의 향신료와 인도의 후추, 무명 및 다이아몬드를 본국에 실어다 팔아 은을 마련했다. 그 무렵 은은 국제 화폐였다. 그 은으로 인도네시아 가는 길에 인도에 들러 후추와 무명을 샀다. 당시 인도 께랄라에서는 6세기 이후 그곳에서 설립된 유대인 상인 조직에 있어 그들에 의해 보석류 등 각종 진기한 물건들의 외부 교역이 행해졌다. 유대인들은 인도에서 산 후추와 무명을 갖고 인도네시아에 가 향신료와 바꾸고 일본에 가서 은과 구리와 바꾸었다. 그리고 일본 은을 중국에 가서 금과 비단으로 바꿨다. 한 행차에 몇 번의 거래를 하여 수익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 삼각무역 구조는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호르무즈 활용으로 일년내내 교역이 가능해지다

이러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중요한 전기가 도래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아시아의 귀중한 상품이 직접 거래되던 페르시아만 어귀 호르무즈 해협의 호르무즈 항구를 1515년 포르투갈이 선점하면서 그들이 동인도 무역을 본격적으로 독점할 수 있었다. 호르무즈가 고대로부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핵심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배들이 이곳까지만 오면 아라비아 대상들이 물건을 받아 서양에 넘겼다.

그 무렵 유대인을 추방해 버린 포르투갈은 그 대타로 독일의 유대인 거상 푸거 가문과 손을 잡았다. 포르투갈 왕실은 스페인의 압력으로 부득이 포르투갈 내 유대인을 추방하게 되자 동방무역의 특권을 독일 푸거 가문에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푸거 가문이 동방무역에 대한 자금을 댔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인도 및 말레이 군도에서 모아들인 귀금속과 향료 등 동양 상품을 가득 실은 포르투갈 배가 동인도 무역을 독점적으로 주도했다. 인도에서 돌아오는 포르투갈 배가 호르무즈에 도착할 즈음 중동 지역에서 1000-4000여 마리의 낙타로 이루어진 대상들이 은과 금, 그리고 상품을 가득 싣고 호르무즈에 모여 거래가 이루어진다. 푸거 가문의 매니저들은 이 거래를 통해 돈을 벌어 리스본에서 자금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유럽으로 보낼 향료를 적기에 다시 구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박이 인도양 남단을 멀리 횡단하여 아프리카를 돌아 포르투갈까지 가야할 필요가 없어지자 계절풍(몬순)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는 연안 항로를 이용해 일 년 내내 교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원거리 해양 무역을 결정하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계절풍이었다. 무역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계절풍은 여름과 겨울에 대륙과 해양의 온도 차로 인해서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을 향해 불고, 여름에는 대양에서 대륙을 향해 불어, 반년 주기로 풍향이 바뀌는 바람이다. 이렇게 바람의 방향이 1년에 한 번 바뀌면서 아시아 해양 지역 곧 광둥에서 인도양을 거쳐 홍해 입구 모카까지의 모든 선박의 교역 일정을 결정했다. 바람이 몇 달 동안 한 방향으로만 불다가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부는 마당에 계절풍에 맞서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무역상은 한 방향으로 될 수 있는 한 멀리 갔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렇게 해상무역 상인들의 행동반경이 제약되고, 그다음 일은 중개 상인들의 몫이 된다.

포르투갈은 호르무즈의 지배로 계절풍이 뚜렷이 나타나는 인도양을 항해하지 않고도 동방 물품을 대상들에게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본국까지 갈 필요가 없어지자 선박의 운행 기간이 대폭 단축되어 거래 회전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왕복에 2년 이상 걸리던 뱃길을 6개월 미만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르무즈의 점령으로 본격화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는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호르무즈 활용으로 날개를 활짝 펴다

이후 반전이 일어난다. 영국과 연합한 페르시아가 1622년에 호르무즈를 다시 탈환함으로써 아시아에서 독점적인 포르투갈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호르무즈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유 교역이 허용되었다. 그 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미 기항지로 점령했던 중국의 팽호에서 물러나 중국의 영토가 아닌 대만을 점령하였다. 그 뒤 네덜란드는 1662년 명나라의 정성공에 의하여 쫓겨나기까지 대만에서 인력수출 및 사슴 사냥 등의 사업을 영위했다. 이어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 문제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쫓겨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39년부터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했다.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후 아시아 교역에서 네덜란드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그 뒤 네덜란드는 1641년 말라카에 향료항구를 건설하고 남반부 아래로 탐험을 계속했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네덜란드 항해사 아벨타즈만은 1642년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섬이 자기 고향인 네덜란드의 주 질란드(Zealand)와 닮았다 해서 ‘New Zealand’라고 불렀다. 그 뒤 그는 호주를 탐험하여 시드니 앞 바다와 섬이 그의 이름을 본 따게 되었다. 그 뒤 네덜란드인들은 1650년 스리랑카에 향료항구를 건설한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희망봉을 빼앗고, 뉴질랜드를 식민지로 만들고, 브라질을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이번에는 미주 대륙을 공략하기 위해 서인도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1630년부터 1654년까지 브라질 동북부를 점령해 유대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설탕 산업을 본격적으로 키웠다. 설탕 또한 당대 최고의 부가가치 상품이었다. 그 뒤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1696년 인도네시아에 세계 최초의 커피 농장을 만들었다. 이후 오랜 기간 커피 수출을 독점할 수 있었다. 돈 되는 곳의 돈 되는 사업은 모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유대인 손아귀에 들어왔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통해 글로벌 경제를 이룬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만행

정향. /위키피디아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말루쿠제도를 접수한 네덜란드인들은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이 섬에서만 정향을 생산하도록 했다. 정향은 늘 푸른 큰키나무로 분홍 꽃이 피는데, 이 꽃이 정향의 원료다. 꽃이 피기 바로 직전에 따서 햇볕이나 불을 지펴 말린다. 말린 꽃봉오리가 마치 못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丁香)이라 하며, 영어 이름인 클로브(clove) 역시 클루(clou, 못)에서 유래되었다. 정향은 고대부터 대표적인 묘약의 하나였다. 게다가 정향은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향료 가운데 부패방지와 살균력이 가장 뛰어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은 이후에도 무력으로 향신료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량공급은 정향의 가격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향신료에 다른 품종을 첨가하는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비자의 불신을 초래하여 가격이 곤두박질하며 폭락했다. 1760년 암스테르담에서는 향료 가격을 인상할 야욕으로 산더미 같은 향료 재고를 불태워버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향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수송하려는 의도가 가격 폭락을 초래하게 되자 네덜란드인들은 암보아나와 테르내이트 지역의 극히 일부만을 제외한 모든 향료의 섬들에 자라는 모든 정향나무를 뽑아냈다. 그 뒤 향료를 불법적으로 재배하거나 거래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했다. 원주민들의 수입원은 오랫동안 정향에 의존해 왔었으나 이러한 조치에 의해 지역경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애기를 출산한 기념으로 정향나무를 심던 원주민들의 전통마저도 큰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정향나무의 죽음은 곧 어린이들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원주민들은 믿었다.

1770년 모리셔스의 프랑스인 총독은 말루쿠로부터 어렵게 정향나무 씨앗을 훔쳐 동아프리카의의 농장에서 재배했다. 이후 광범위한 향신료 산지로부터 향료 공급이 증가되자 향료 독점권은 무너지고 가격이 하락하여 일반 서민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과 펨바 섬은 세계 정향의 9할을 공급한다.

반면에 정향나무 원산지였던 인도네시아는 오히려 정향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역사의 반전이다. 인도네시아가 가장 많은 정향을 소비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후반에 인도네시아인들은 담배와 정향을 혼합해 ‘크레텍(kretek)’이라는 정향 담배를 최초로 생산했는데 담배를 피울 때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나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7만명의 노동자가 이것의 생산에 종사할 정도로 크레텍의 수요는 엄청나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은 세계 정향의 절반을 연기로 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