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Media]
이란 북서부에 있던 고대 국가.
대체로 지금의 케르만샤 일부와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지방에 해당한다. 아시리아 샬마네세르 3세(BC 858~824)의 문헌에는 '마다' 지역 사람들이라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들이 뒤에 메디아인으로 알려졌다.
헤로도토스는 '프라오르테스(BC 715경으로 추정)의 아들 데이오세스'가 메디아 왕국을 세우고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에 수도를 세웠다고 했지만, 데이오세스의 손자인 키악사레스가 이란어를 사용하는 여러 메디아 종족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한 것을 BC 625년 이전의 일로 보기는 어렵다.
키악사레스는 BC 614년 아슈르를 점령했으며, BC 612년에는 바빌론의 나보폴라사르 왕과 동맹을 맺어 니네베를 함락하고, 마침내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두 전승국이 아시리아 영토를 나누어, 키악사레스가 이란의 대부분과 아시리아 북부, 아르메니아 지방을 차지했다.
여러 관점에서 볼 때, 메디아 제국의 국가체계는 아시리아와 유사했던 듯하나, 실제로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메디아식(式)'이라고 할 만한 유물은 별로 발견되지 않았으나, 메디아인들이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아시리아로부터 미술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메디아어로 씌어진 기록물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메디아인들의 문화와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추측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BC 550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종주국인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 황제를 굴복시키자, 메디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아케메니아 제국에서도 메디아인들은 우세한 지위를 차지했다. 즉 명예와 군사력 면에서 볼 때 이들은 페르시아에 버금갔고, 이들의 궁중의례는 아케메니아 왕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엑바타나는 새 군주들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다.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메디아를 점령하고, 자신의 제국을 분할해, 메디아 남부를 마케도니아의 페이돈에게 주어,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에 넘겨주었으며, 메디아 북부는 이전에 다리우스 3세의 장군이었던 아트로파테스에게 주었다. 아트로파테스는 수도를 가자카에 정하고, 아트로파테네라고 불리는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그뒤 아트로파테네는 차례로 파르티아·아르메니아·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메디아 남부는 1세기 반 동안 셀레우코스 왕국의 영토로 남아 있었고, 그리스 문화가 이 지역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BC 152년 메디아는 파르티아의 왕 미트라다테스 1세에게 점령당했으며, 이무렵 아트로파테네와 함께 사산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이 시기에 메디아인들은 이미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란족에 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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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대 제국과 페르샤의 초기 역사
메대(the Medes)는 민족 이름이고, 메디아(Media)는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메대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야벳의 아들 마대(Madai)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로(창 10:2, 대상 1:5), 페르샤와 함께 인도-유럽족(Indo-European)에 속한다. 이들은 페르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에 놓인 이란고원(高原) 지대에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아리아누"(Arianu) 즉 "귀족들"(nobles)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아리아나"(Ariana) 혹은 지금의 이란(Iran)으로 1935년부터 불려지고 있다.
이들 메대 족속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9세기 중엽인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III세(859-824 BC) 때부터인데, 그후로는 계속 역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거듭거듭 정복되어 조공을 바쳤고, 북방 이스라엘이 망한 후, 포로된 백성들이 앗시리아에 의해 메대의 여러 도시들로 강제로 이주되기도 했다(왕하 17:6, 18:11).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기원전 7세기 초에 데이코스(Deikos·혹은 BC 700 - BC 647 )가 일어나 메대 족속들을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고, 엑바타나(Ecbatana)를 수도로 정하였다.
데이코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파라오르테스(Pharaortes)가 22년간(BC 647 -BC 625)다스렸는데, 이 때 그들 남쪽에 있던 페르샤족을 복종시켰다고 한다.
그 후 파라오르테스의 아들인 시악사레스 1세(Cyaxares I)가 즉위하여 약 40년간(BC 625 - BC 585) 다스렸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넘어뜨리기 위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인 바벨론의 나보포랏살과 동맹을 맺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정복한 앗시리아의 영토는 양분하여, 티그리스강 동쪽과 북쪽은 메대가 차지하고, 바벨론은 이 자연적인 경계선의 서쪽과 남쪽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실(王室)혼인이 이루어져, 시악사레스 1세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 아미티스(Amytis)가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그 후 시악사레스는 소아시아의 스키디아(Scythians)족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병합하였으며, 기원전 585년에는 리디아와도 접전했으나, 그해 5월 28일 일식(日飾)이 일어나자 서로 전투를 중지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시악사레스 1세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즉위하여 약 35년간(BC 585 - BC 550) 다스렸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의 외조부라고 전한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아스티아게스는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Mandane)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하여 딸을 메대의 귀족에게 시집 보내지 않고, 안산(Anshan)에 있는 그의 페르샤의 봉신왕(封臣王)인 캄비세스 I세(Cambyses I c.600 - 559)에게 멀찍이 시집 보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혼 관계를 통하여 태어난 사람이 바로 페르샤의 국부(國父)인 고레스 대왕(Cyrus II 558-530 BC)인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가 12세 되었을 때,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는 딸과 외손자를 불러들였는데, 어머니가 귀국한 뒤에도 고레스는 메대에 남아서 외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은 그가 장차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한 때 외조부에 의해 고레스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고레스에 의하여 도전받게 되었다.
기원전 553년 고레스는 종주국(宗主國)인 메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외조부 아스티아게스에 도전했다. 처음 두번은 패했지만, 세번 째 싸움에서 메대의 주장(主將) 하르파구스(Harpagus)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BC 550년 고레스는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아스티아게스도 사로잡았으나 선대(善待)하여, 저 멀리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 장관으로 보낸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본래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두 왕가가 왕실 결혼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한 나라 같았기 때문에 급격한 정변(政變)은 없었고, 한 왕가에서 다른 왕가로 정권이 교체된데 불과했다. 단지 페르샤의 귀족들이 정부 요직(要職)에 대거 진출한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역시 유능한 메대 사람들도 여전히 기용되었다.
고레스는 메대 사람들에게 유화(宥和)정책을 써서,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아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바벨론을 침공하여,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Gubaru), 혹은 희랍어로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벨론에 진입(進入)했고, 고레스는 10월 29일에 입성했다.
메대(Mede)
뜻:헤아림
산이 많은 나라로서 북은 가스피, 동은 사막, 남은 파사, 서쪽으로 앗수리아 알메니아가 있다.
고대 유럽 민족으로서 B.C. 7세기에 페르샤에 흡수되었다.
(1)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를 쳐서 취한 후, 그 백성을 포로잡아 메대로 끌고 왔다(왕하17:6).
(2) 이사야는 메대가 바벨론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하였다(사13:17).
(3) 메대인 다리오 왕때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 갔다가 나왔다(단5:31, 6:23).
(4) 이 지방에 거주하는 유대 인들이 600여 마일되는 예루살렘에 절기 지키러왔다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목도하였다(행2:9).
(5) 메대인은 은을 돌아 보지 않으며 금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사13:7)
메대 왕국(BC 727 - 549, 178년간)
메대인들은 이란 페르세폴리스의 아판다나에서 발굴된 이 부조에서 보이는 것처럼, 높고 세로 골이진 관을 쓰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은 페르시아인들과 구별된다."> 쿠틸인으로 불린 산악민족과 아리얀족이 함께 동화되어 형성된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들이, 기원전 727년에 메데왕국을 형성하였고 전 중동을 정복하였다. 이때 니느웨를 비롯해서 바빌론 등 성경에 멸망이 예언된 국가들이 파멸되었다.
세 번째 왕 Cyaxares the Great키악사레스 (624-585)가 니느웨를 정벌(BC 612)하였고 앗시리아를 무너뜨렸다. 이때 사용된 군사전술이 '카라'라고 불린 게릴라를 이용한 전술이었다. 지금은 '페슈메르가'라고 불린다.
마지막 왕인 Rshti-vega Azhi Dahak(584-549)는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을 페르시아 장군에게 주었고, 그들 사이에서 난 외손자 가 메데-파샤제국을 세운 키루스 2세(Cyrus, 구약성서의 고레스)이다. 메대제국의 권좌는 이제 페르시아 아케메니드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마지막 왕 통치기의 천사숭배가, 초기 조로아스터교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마기(사제)제도가 소개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마지막 왕 Azhi Dahak을 악마로 보았다.
그래서 여전히 아즈다학은 쿠르드 야르산 종교를 믿는 자들에 의해 원래 이름은 없어지고 술탄 싸학(Sultan Sahak)으로 숭배된다. 쿠틸인들이 아리얀화된 이후에 현재의 이란적인 문화로 바뀌었다. 그 전에는 현대의 그루지야와 같은 코카서스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현대 쿠르드에 남아있는 메데인의 흔적은 지명에 붙은 mah 또는 mai이다. 이것은 메데를 뜻한다.
(자료 출처 : 쿠르드족의 친구들, Here kr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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