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그림책 여우 - 사랑 욕망 질투에 대하여

달무리지는 2022. 3. 18. 07:54

사랑과 욕망, 질투에 관한 그림책

중앙일보

입력 2022.03.18 06:00

저희집 어린이는 요즘 단짝 친구를 만들려고 애씁니다. 지난해 같은 반 단짝 친구와 다른 반이 되었거든요. 특별한 친구를 갖고 싶어 하는 아이를 보며 ‘언제 이렇게 자랐지’ 하는 대견한 마음과 동시에 ‘이제 서운하고 아픈 감정도 겪겠구나’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상대가 나 같지는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같습니다. 관계라는 게 그렇죠. 내가 쏟는 마음과 에너지에 비례해 상대의 마음도 커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나의 바람을 투영해 상대라는 이미지를 만드니까요. 상대에게 실망하는 건 사실 나의 문제입니다. 상대는 늘 그런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깊은 관계일수록 더욱요.

마거릿 와일드의 『여우』는 날개를 다친 까치, 한 쪽 눈이 없는 개 그리고 불안한 눈빛을 가진 여우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 까치가 한 마리 있습니다. 날개를 다쳐 더는 날 수 없습니다. 삶을 포기하려고 했죠. 그런 까치에게 개 한 마리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난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그래도 산다는 건 멋진 일이야!”

매일 커지는 상실감과 슬픔을 견디지 못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 순간 개는 까치를 등에 태우고 달립니다. 바람이 까치의 깃털 속으로 스며듭니다. 까치가 말하죠.
“내가 너의 눈이 되어 줄게. 너는 나의 날개가 되어 줘.”

둘은 그렇게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왠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의 여우가 까치는 거슬립니다. 그런데 개는 여우를 반겨 주죠. 심지어 함께 지내자고 하고요. 여우는 개와 까치의 대화에 자꾸 끼어듭니다. 그럴 때마다 까치는 여우의 시선을 느낍니다. 외로움과 분노, 그리고 질투의 시선을요.

까치를 바라보는 여우의 섬뜩한 시선. 여우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제적 캐릭터다.

까치는 여우를 경계합니다. 개에게 “여우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애야. 조심해”라고 말하죠. 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우는 좋은 애야.”

어느 날 여우가 까치에게 말합니다. “나는 개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바람보다 더 빨리. 나랑 함께 가자.” 물론 까치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나는 절대로 개를 떠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개의 등에 타고 달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죠.
‘이건 하늘을 나는 게 아니야. 하늘을 나는 건 절대로 이렇지 않아!’

마거릿 와일드는 “어린이 책에 담기 어려운 소재를 다루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림책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여우』를 읽어보면 이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지실 겁니다. 저는 이 책을 동네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요, 그 자리에 선 채로 단숨에 읽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죠. 단언컨대 제가 본 그림책 중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이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욕망), 그것이 좌절됐을 때 실망하고, 관계에서 위로를 얻고, 관계가 흔들릴 때 질투와 분노의 감정을 느낄 겁니다. 다만 그 감정들을 하나씩 쪼개고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일은 거의 없죠. 요즘 유행하는 ‘메타인지’가 발달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여우』는 아이에게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되짚어 보는 기회를 선물할 겁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바로 질문입니다. “까치의 선택은 좋은 선택이었을까?”,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친구들 사이에서 너는 까치와 개, 여우 중에 어떤 동물인 것 같아?”, “여우는 왜 그랬을까?” 같은 질문을 던져보세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 책이 명작(名作)으로 꼽히는 이유죠.

이 책의 강렬함을 완성하는 건 론 브룩스의 그림입니다. 불안한 듯 섬뜩한 여우의 눈은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여우의 붉은 털 역시 책 전반에 깔리는 어두운 색감과 대비되어 긴장감을 만들죠. 거친 붓 터치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요. 론 브릭스는 마거릿 와일드와 여러 작품을 작업했는데요, 이야기마다 각기 다른 느낌을 완벽하게 구현해냅니다.  『할머니가 남긴 선물』, 『로지에게 동생이 생겼어요』는 이야기에 걸맞게 따뜻하고 귀여운 느낌이 물씬 풍기죠.

마거릿 와일드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어둡고, 거칠게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론 브룩스의 그림이다.

자, 그래서 까치는 어떻게 됐을까요? 여우의 등을 타고 달렸을까요? 여우와 개, 까치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책의 강렬함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도록 스포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책을 꼭 읽어보세요. 너무 중요해서 두 번 말할게요. 꼭 읽으셔야 합니다. 그림책이 결코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라는 걸 느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