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여왕, 1492년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다
1492년, 이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 나뉘어
스페인 왕국,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인 ‘레콩키스타’를 성취
이슬람 세력 유럽 대륙에서 몰아내
동시에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어
‘1492년’, 이해를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가 나뉜다. 세계사적 분기점이 될 정도로 중요한 해였다. 과연 이해에 무슨 일이 있어 세계사의 분기점이 된 것일까?

이해에 세계사적 사건 3가지가 동시에 발생했다.
스페인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성취해 이슬람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몰아냈다. 그와 동시에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었다. 경제사에 있어 1492년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해에 스페인 왕국은 기독교 국가임을 천명하며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유대인이 사라진 스페인 왕국은 퇴조의 길을 걷게 되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몰려간 네덜란드는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탄생과 유대 금융자본주의의 출현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유대인 추방령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탄생시킨 씨앗이 1492년에 심어졌다.
◇이사벨, 중세 역사를 주도한 이슬람을 몰아내어 유럽의 자존심을 회복하다

‘레콩키스타’는 재정복이란 뜻이다. 전성기에 비해 많이 약해진 이슬람 세력은 결국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까지 내주고 1492년 완전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퇴각했다. 레콩키스타의 완성은 스페인 왕국의 군사적 승리에 머물지 않고 서구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신호탄이었다.
역사라는 것이 본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중세의 역사는 왜곡이 심한 편이다. 중세 역사의 주인공은 단연 이슬람이었다. 중세 780년간 유럽의 기독교 왕국들은 좌우에 포진한 이슬람 세력에 억눌려 꼼짝 못 하고 갇혀 살았다. 지중해 역시 이슬람의 바다로,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유럽 기독교 왕국들은 군사력, 경제력은 물론 과학기술과 문화 면에서도 이슬람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당시 이슬람은 아직 유럽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 우월했다. 화약과 대포가 있어 군사적으로 훨씬 강했을 뿐 아니라 나침판이 있어 해상 운용 능력도 발달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종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인쇄술이 발달해 책과 도서관이 있었다. ‘화약, 나침판, 종이, 인쇄술’ 등 동양의 발명품을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던 이슬람이 잘 활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판국에 1492년 스페인 왕국이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레콩키스타는 유럽 기독교 세력들에 있어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492년에 레콩키스타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말고도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유대인 추방령’이다. 이 추방령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 수십만 명이 스페인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유대인 추방령은 두고두고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발생한 벨기에 부뤼헤(부뤼주)와 안트워프의 발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항구 재건과 플류트선의 개발,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만개, 항해조례와 영란전쟁, 명예혁명, 영국의 산업혁명과 전파, 신대륙의 부흥 등이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라는 키워드 없이는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사벨 공주와 페르난도 왕자의 세기적 정략결혼
이러한 세계적 사건들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의 정략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이 결혼으로 두 왕국은 연합체제를 구축해 스페인을 통일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왕은 자기의 이복여동생 이사벨 공주를 포르투갈 왕가와 결혼시켜 차기 왕위계승 후계자인 이사벨을 포르투갈로 보내 버리려 했다. 이를 눈치챈 이사벨은 선수를 쳐서 1469년 비밀리에 자신의 결혼을 주도해 바야돌리드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두 왕국은 1479년에 통일을 하게 되고 힘을 모아 이슬람 왕국과 20여 년에 걸친 국토회복 전쟁을 치러 이슬람 교도를 1492년 1월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냈다. 이른바 레콩키스타이다. 그리고 정복한 그라나다 성에서 같은 해 3월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으며, 여왕이 후원한 콜럼버스가 같은 해 10월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들의 험난했던 결혼 과정을 보자. 1451년 카스티야의 공주로 태어난 이사벨은 명석하고 당찬 여성이었다. 1464년 왕과 귀족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무능한 엔리케 왕 대신 왕의 이복 동생 알폰소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결과는 3년간의 내란이었다. 1467년 알폰소가 14살의 어린 나이로 죽자 내란은 막을 내렸다.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알폰소의 지지 세력은 이번에는 알폰소의 누나 이사벨을 국왕에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사벨은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이복 오빠이자 국왕인 엔리케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반 엔리케파는 다음 계승자로 이사벨을 밀었고 힘에 밀린 엔리케 왕은 그녀를 일단 후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에게는 후아나라는 딸이 있어 왕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불안을 느낀 이사벨은 세고비아로 올라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보호해 줄 강력한 결혼 상대자를 물색했다.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의 혼인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포르투갈, 아라곤 왕국, 프랑스가 제각기 결혼 상대 후보를 내놓았다. 엔리케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선교사를 보내 알아본 다음, 동맹 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 영해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등을 지배하고 있는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 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마음에 두었다.
18세의 이사벨은 고심 끝에 혼자서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17세의 페르난도 왕자를 배우자로 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백년 전쟁에서 승리한 신흥강국 프랑스는 주위에 강력한 통일 스페인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구나 당시 세력가들이었던 카스티야의 영주들조차 강력한 왕권주의자인 페르난도를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둘은 근친 간이었다. 당시 유럽 왕족들은 왕족들 간의 결혼으로 그리 멀지 않은 친척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톨릭은 원칙적으로는 근친 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려면 교황의 특면장이 필요했다. 이사벨은 자기의 지지자인 톨레도 대주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사벨은 몰래 결혼식장인 바야돌리드로 향했다.
급보를 접한 엔리케 왕은 이들의 결혼을 막으려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위기의 순간에 톨레도 주교의 군대가 그녀를 구출했다. 그녀는 무사히 지지자들의 도시인 바야돌리드로 입성했다. 그녀의 손에는 교황의 특면장이 들려있었다. 후일 이 특면장은 톨레도 대주교가 위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르난도 왕자는 결혼식 며칠 전에야 상인으로 변장한 몇몇 측근들과 함께 아라곤 왕국의 수도 사라고사를 출발했다. 그는 주로 밤을 이용해 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바야돌리드에 도착했다. 1469년 10월 19일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엔리케 왕은 자신의 허락 없이 페르난도와 결혼한 이사벨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며 왕위계승권 박탈을 선언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안을 느낀 카스티야 귀족들의 세력도 갈수록 커졌다. 이 와중인 1474년 엔리케 왕이 돌연 사망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23세의 이사벨은 즉각 카스티야의 왕은 자신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쪽에서는 엔리케의 딸 후아나가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후아나의 남편이자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 국경을 넘었다. 5년간의 내전 끝에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포르투갈 연합군을 격파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 곧 스페인 왕국이 탄생했다.
◇당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 스페인 왕국
로마제국 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한 제국이 스페인 왕국이다. 이러한 영광 뒤에는 막강한 경제력의 유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14~15세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가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 인구가 700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7%인 약 50만 명 정도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톨레도와 같은 주요 도시의 경우에는 인구의 1/3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가 44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스페인 방방곡곡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스페인 왕실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당시 부유층이었던 유대인들의 재정적 도움이 절실했다. 또 혼란기 국가를 이끌어 가기 위해 능력 있는 유대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이들을 상업, 무역업, 수공업은 물론 의술, 통역 등에 활용했다. 또 세무, 재정, 관리 부문에도 중용하여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게 했다. 부(富) 이외에도 그만큼 그들의 재능과 정직성이 뛰어났다는 증표다. (다음 편에 계속)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1492년 1월 2일 마지막 이슬람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석 달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 인구 700만 명의 6.5%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숫자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장원제도가 발달한 중세에 농촌에 살지 않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했다. 유독 스페인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던 이슬람들이 500년 이상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대 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시대였다. 그 무렵 수도 코르도바는 문화와 상업이 발달한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도시였다.

1492년 스페인 법원 대심문관이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유대인 추방령에 서명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에밀리오 살라 작, 1889년. /위키피디아
그러다 11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교조주의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며 학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피난 길에 올라 북부 스페인 왕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당시 스페인의 재정 고문 아이삭 아브라반넬도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을 무역 경제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유대인 추방령을 돈으로 막으려 하다가 실각한다.
유대인 추방은 전쟁 후유증으로 불거진 사회적 불안이 크게 작용했다. 왕실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기독교 국가의 위엄을 세우려는 의도로 기독교로의 종교 단일화를 제시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 이유도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데는 유대인 추방과 재산 몰수가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다.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4개월 이내에 스페인을 떠나라고 선포한 추방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화폐와 금, 은 등 귀중품은 가져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발각되면 처형이었다. 한마디로 억지였다.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칙령이 발표되자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몇 달 이내에 헐값으로 팔아 치웠다. 집을 주고 당나귀를 얻었고 포도원이 몇 필의 포목과 교환되었다.

유대인 추방령. /위키피디아
이렇게 재산을 급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평상시에도 나누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1/3은 현찰로, 1/3은 보석이나 골동품 같은 값나가는 재화로, 1/3은 부동산으로 부를 분산시켜 관리했다. 안정적인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 와중에도 대부업을 했던 유대인들은 담보대출 시 저당 잡은 보석류를 챙겼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토지나 부동산 소유는 법으로 금지당했기 때문에 대부분 저당물이 보석류였다. 당시 보석류는 오늘날과 같이 높은 경제적 가치는 없었지만 이는 후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안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등 보석시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다.
떠나기에 앞서 12살 이상 되는 아이들은 모두 결혼시켜 가족을 이루게 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어야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이라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레나 나귀에 짐을 싣고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단 4개월만인 8월 초에 이르자 추방은 완결되었다.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이리하여 유대인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약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여 년 사이에 스페인을 떠났다. 그 무렵 인구 3만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26만 명은 대단한 숫자였다.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는지는 학자에 따라 13만~80만 명까지 다양하다.
1492년 8월 2일 세비야 근처 항구에서는 마지막으로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바로 그 가련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하여 그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콜럼버스 자신을 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북부에 살던 1만 2천 명가량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에 가까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재판 제도의 도입을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왕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바라 왕국도 결국 종교재판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으로 잠시 피신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했고,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로 향했다.
◇결국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해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17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10만 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1495년 마누엘 1세 왕이 포르투갈의 권좌에 올랐는데,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다. 이들 부부는 마누엘의 포르투갈 왕국 내에 비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1496년 12월 포르투갈 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전에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모두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마누엘은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유대인들이 떠나는 길을 방해했다. 마감 날이 지나자 마누엘은 미처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노예라고 선언하고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이들 중 다수 역시 비밀리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마라노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1497년에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유대인, 플랑드르의 안트워프와 부뤼헤 등으로 향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비교적 안전한 북해 연안의 저지대 곧 플랑드르의 부뤼헤와 안트워프로 향했다. 그곳에는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반겨 맞아 주었던 오스만제국으로 향했고 또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이주 중에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프랑스로도 이주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몽테뉴를 존재케 했다. 그의 어머니가 스페인계 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모로코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유대인 정착촌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을 떠나온 유대인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멜라(mellahs)”라고 하는 특별 구역에 격리되어 살았으며 유대인으로 인식케 하는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모로코에 2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스페인 애저요리의 유래
그 뒤에도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마라노 무리가 여전히 몰래 유대교 관습을 지킨다고 보았다.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지금도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톨레도와 세고비야에는 새끼돼지를 구운 애저요리가 유명하다. 톨레도에는 축제 때 돼지고기를 먹는 행사가 있다. 이는 당시 마라노들이 공개석상에서 유대인들이 금기시 했던 돼지고기를 먹어 보임으로써 그들의 개종을 만천하에 알리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애저요리(Cochinillo)는 생후 2주 된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어서 먹는 스페인의 특선 요리로 접시로도 잘라질 만큼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일품이다.

세고비아 식당에서 애저를 접시로 자르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 뒤에도 종교재판을 피해 약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스페인을 떠났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안트워프, 암스테르담 등지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경제력이 중부 유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사회의 몰락은 유대사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였다.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스페인 카디스 등에 유대인들이 진출한 기록이 있다. 적어도 솔로몬 시대부터 스페인에는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그곳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며 유대인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유대인 추방으로 금융업과 유통업의 몰락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 결과 그들이 많이 살았던 주요 상업도시의 집세와 가게세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바르셀로나는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이로써 인구의 6.5%가 유대인이었던 아라곤 왕국은 금융업과 상업이 몰락하다시피 타격이 컸다. 전성기에 300개의 작업장을 자랑했던 바르셀로나의 면직물 산업은 15세기 중엽에 10개 정도의 작업장만을 운영하는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유대인 추방은 한마디로 고급두뇌와 핵심 인재의 유출이었다. 당시 의사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 납세자도 유대인이었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마라노들도 유대인 티를 안내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인 직업들을 버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그들의 재능도 함께 땅에 묻어버렸다.
그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인도 제도에서 후추와 향신료를 싣고 와도 유통망이 붕괴되어 소비자가 있는 북유럽으로 유통시킬 방도가 없었다. 동인도 제도로 싣고 갈 교역품도 구할 수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생산과 유통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유대인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이는 국고 수입 감소로 직결되어 스페인 왕국은 중남미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지속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수 차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다음 편에 계속)
알람브라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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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된 칙령의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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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칙령은 1492년 3월 31일 조인된 칙령으로서 유대인의 추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합작하여 발표한 조약으로 유대인들을 7월 31일까지 추방하도록 했다.
8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상황이 초래된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의 세력도 확장되는 한편 로마 제국 시대에 건너온 유대인들은 더욱 부를 누리며 ‘지식을 가진 자들’로 여겨지며 특권을 누렸다. 이베리아의 로마 가톨릭 박해가 그라나다와 코르도바 등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과거 자신들이 겪은 박해의 앙갚음을 위해 간접 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슬람 군주들은 유대인의 이민과 무역 활동을 더욱 장려하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왕조의 세력이 기울면서 유대인의 거주 환경은 갈수록 악화된다.
레콘키스타는 이슬람 세력의 점차적인 멸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에는 가톨릭 국가로 공인된다. 14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포르투갈 전체가 무어인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에 대한 통제 행위는 더욱 높아져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 국가나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가톨릭 신도’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개종이 처음 일어났을 즈음에는 문화 차이를 극복할 좋은 방안으로 여겨지면서 많은 가정들이 이를 택하고 부를 누렸다. 그러나 결국 왕실과 교회의 눈밖에 나면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왕권세력은 유대인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칙령[편집]
알람브라 칙령은 그라나다 정복이 이뤄진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를 무너뜨리고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단 4개월 만에 떠날 것을 강요받거나 개종을 명령 받았다. 당시 스페인 인구 700만 명 중에서 유대인은 수십만 명 정도였지만, 도시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1] 에스파냐는 유대인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칙령에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단서 조항으로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을 금지한다"고 하면서 겉으로만 재산의 반출을 허용했을 뿐 실제로는 금지시켰다.[2] 명시한 기한까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처형됐으며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들로부터 모든 재산을 압류했다. 추방의 결과로 스페인계 유대인은 마그레브 지역으로 대부분 이주하거나 산발적으로 흩여졌다. 남동부 유럽으로 안전한 생활을 찾아 이주한 자도 다수였으며 이미 존재하던 동부 유럽계 유대인 공동체에 흡수됐다.
학자들에 따라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칙령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떠났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13만에서 최대 80만까지 보는 학자도 있다. 절반 이상이 포르투갈로 이주했으나 유대인들의 상술과 지식을 높게 산 포르투갈 왕실에 따라 유대인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계속 신앙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밟은 콜럼버스, 1862, 디오스코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 /위키피디아
◇금가루보다 비쌌던 고대의 후춧가루
후추 등 향신료는 경제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발, 마젤란의 세계 일주 등이 모두 인도의 후추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무렵 동양의 향신료가 부의 원천이었다.
◇후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서구에 알려져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후추와 정향 등 많은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330년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시리아, 터키, 페르시아, 인더스강 유역까지 정복하여 동양의 향신료가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원정 때 친구인 식물학자를 대동하여 점령지의 많은 향신료를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부터다. 인도에서 무역풍을 타고 인도양을 건너 홍해를 북상하여 이집트에 도달하는 항로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후추는 실크로드와 바닷길로 상업 중심지인 호르무즈나 아덴에 옮겨진 뒤 그곳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베네치아로 운송되었다. 당시 후추는 굉장히 비쌌다. 실제로 후추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같은 무게의 금과 가격이 같았다. 1세기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후추같이 영양도 없는 것 때문에 매년 5,000만 세스루티우스의 돈을 유출하고 있다”고 개탄할 정도로 후추는 비쌌다.
◇후추 수입에 성공하면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다
후추는 열대성 식물이라 유럽에서는 재배가 어려워 동서무역 하는 대상들로부터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후추는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져 순은 항아리에 넣어 소중하게 다루었다. 중세 게르만 사회에서는 세금 납부나 관료 급료, 땅 매매나 임대, 결혼 지참금 등에 후추가 쓰였다. 당시 인도에서 후추를 싣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선원들은 고향에서 영웅이 되고 항해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유럽인들이 비싼 후추에 열광한 이유
유럽 사람들은 왜 비싼 향신료를 그토록 선호했는지를 보자.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소금에 절인 고기와 생선 그리고 빵이 주식이었다. 염장식품에 신물이 난 귀족과 세도가들은 후춧가루를 뿌린 신선한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또 짜고 맛없는 음식에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넣으면 맛이 좋아졌다. 그래서 동방의 향신료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비린내를 제거하고 육류를 저장하는데도 향신료를 사용했다. 하지만 향신료 가치는 단지 음식의 맛을 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성욕을 돋우는 강장제와 의약품으로 믿어져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특히 전염병을 예방하는 살균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귀족들과 부유층들이 앞다투어 샀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주도한 중세 후추 교역
중세 들어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면서 유럽과 동양을 잇는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단절시킨 뒤부터 향신료는 아랍 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가격이 오르고 거기에다 술탄이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여 더욱 비싸졌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지했다. 이 통에 베네치아의 유대인 상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후추를 사들여 막대한 이윤을 붙여 유럽에 팔았다. 그러다 보니 후추의 최종 소비자가격은 금가루보다 비쌌다. 귀하다 보니 은 대신 화폐로 통용된 때도 있었다. 이쯤 되자 후춧가루는 베네치아 공국을 제외하고 유럽 각국에서 고대 소금같이 왕실 전매품이 되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주로 이슬람 지역 유대 상인들과 독점 거래를 했다. 12세기 바그다드에는 4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무역업에 종사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그들에게 모직물을 팔고 그 돈에 은을 보태어 향신료를 샀다. 일부는 호르무즈나 아덴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직접 향신료를 사서 바그다드를 지나 흑해 남부 해안을 경유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했다. 이후 향신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뱃길로 베네치아로 운반되었다. 나중에는 이슬람 내 향신료 유통의 주도권이 이집트의 카라미 상인들에게 넘어가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도 향신료 수송을 전담하는 갤리 상선단을 매년 정기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로 파견함으로써 지중해 향신료 교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이어갔다.
◇유대인의 환어음, 귀금속 부족을 보충하다
베네치아가 동양에서 향신료, 비단, 면직물 등을 많이 수입해오는 한편 모직물을 제외하곤 동양에 팔 마땅한 물품이 없었다. 13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도시들이 금화 주조를 재개했음에도 유럽의 금과 은만으로는 늘어나는 교역량을 결제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실물화폐 없이도 거래를 청산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바로 환어음이었다. 이는 베네치아와 이슬람 양 지역의 유대 상인 간의 신용거래였기에 가능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는 탈무드라는 국제법이 규율하고 있어 신뢰와 신용이 생명이었다. 이후 환어음은 실물화폐의 부족분을 메우는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상품거래를 더욱 원활하게 만들었다.
환어음은 발행인이 수취인에게 일정 금액을 빌리고, 합의한 기한에 발행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하여금 환어음 소지자에게 빌린 돈을 지불하겠다는 일종의 지불 명령서이다. 두 지역 간의 거래에 실물화폐 대신 환어음이라는 종이 서류로 거래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환어음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금화나 은화를 직접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환어음을 발행하려면 여러 시장에 사업 조직과 거래처가 있어야 했다. 이런 연유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상업망을 가지고 있었던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환어음 거래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5세기 초 베네치아 무역의 근간인 후추 교역액이 30만 두카토에 달했다. 금 3.56g을 함유한 두카토 금화가 당시 국제 기축통화였다. 이슬람 세계와의 무역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두카토로 지불했고 이슬람 상인들을 인도양에서 향신료를 구입할 때 베네치아 두카토로 결제했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에도 인도와 동남아시아 향신료 생산지들에서 베네치아 두카토가 발굴되곤 한다. 15세기 말 중세가 끝날 때까지 400년 동안 모든 향신료 무역은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져 전 유럽의 무역업자들이 향신료를 사기 위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의 독점으로 다른 나라 상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 특히 바닷길 개척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바꾼 대항해 시작되다

14세기 초 무역을 중시해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元)나라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튀르크족이 오스만제국을 건국해 동서무역에 끼어들어 무역로를 차단하자 향신료 가격이 폭등했다. 1453년 이들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함락해 더 이상 후추를 구입할 수 없게 된 기독교 상인들에게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 개척이 절실했다.
향신료 무역을 이슬람을 통하지 않고 직접 시도한 것이 15세기 말 포르투갈과 스 페인의 대항해 시도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 촉발제였다. 이 책에 향신료 산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중국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는 대목에서 유럽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황금과 후추가 흔하다니 탐험가들의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향신료 획득 경쟁은 결국 항로를 동쪽으로 향한 포르투갈이 서쪽으로 향한 스페인을 이기고 무역권을 독점하게 된다. 대신 항로를 잘못 잡은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했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은 콜럼버스
지금도 유대인이란 가설이 끊이질 않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유대인 선원들과 함께 신대륙을 발견했다. 콜럼버스는 제노바 근처 사보나에서 모직물 무역상 도메니코 콜론과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제노바 사람이었으나 이탈리아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도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무렵 모직물 무역상은 대대로 유대인의 직업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영어식 이름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콜론(Colon)이다. 당시 ‘콜론’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했던 이름으로 그 스스로도 다윗 왕과 관련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최근 유대 연구가들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1391년~1492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을 가져 10대부터 아버지를 도와 직물·포도주 매매를 위해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항해했다. 1474년 에게해 키오스섬에 유향을 사러 가는 항해에도 참가했고, 20대에는 마데이라섬으로 설탕 사러 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콜럼버스는 이미 아이슬란드, 마데이라, 영국, 아프리카 가나를 오가는 해상무역상이었다. 그는 제노바의 상선대 선장이 된 뒤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의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오면 그 옆에 메모할 정도로 탐독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친서를 받아 1492년 대칸이 지배하는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콜럼버스가 찾아가려던 ‘인도’가 우리가 아는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가 휴대한 친서의 수신인은 ‘인도’를 지배하는 몽골의 ‘위대한 칸’이었다. 그는 자기가 도착한 곳이 대칸이 통치하는 대륙에서 아주 가까운 섬이며, 근처에는 은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된 ‘지팡구’ 곧 일본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려서부터 선원 생활로 잔뼈가 굵은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 저 멀리로 돌아가면 인도와 지팡구에 도달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지팡구(Zipangu)란 ‘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인데, JAPAN이라는 명칭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유대인이 만든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

당시 유대인 수학자나 과학자는 남들보다 1세기 먼저 지도와 나침반을 만들어 먼바다 항해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마르코 폴로의 글이 유럽인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1375년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제작된 카탈란 지도(Catalan Atlas)이다. 이는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동방견문록’에 의해 처음 알려진 지명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는 동방 세계에 4장을 할애했다. 동방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도와 나침반의 스승’으로 불린 유대인 아브라함 크레스쿠가 바로 이 지도를 만들었다. 이후 이 지도는 항해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의 아들 자코모 드 마조르카 또한 ‘지도의 유대인’이라고 불리며 사그레섬 해상 관측소 소장으로 일했다.
◇콜럼버스, 풍운의 꿈을 안고 리스본으로 가다
콜럼버스는 1479년 결혼했는데, 그 무렵 피렌체의 의사이자 지리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면 향신료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는 항해계획서를 포르투갈 교회지도자 마린스를 통해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전달했으나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는 1481년 포르투갈 왕에게 자신이 직접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대항해의 꿈을 품고 제노바를 떠나 포르투갈에서 지도 제작소를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를 찾기 위해 당시 ‘지구의 끝’이라고 불리는 리스본으로 갔다. 실제 유럽 사람들은 리스본 위에 위치한 ‘Cabo da Roca’라는 곳을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지구 끝에 다녀갔다는 증명서를 유려한 고어체로 발급해 관광객들한테 팔고 있다.
콜럼버스가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돈 많은 유대인들이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빼곡히 지도 제작소들을 차려 놓고 있었다. 콜럼버스도 그 한편에 ‘콜럼버스 지도 제작소’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모험가들은 인도항로 개척을 위해 희망봉을 돌아가는 방법을 시도했는데 번번이 장애물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생각은 달랐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계속 항해하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언젠가는 인도에 닿으리라 판단했다. 이후 그는 포르투갈의 후앙 2세와 스페인의 공동 왕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의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부되었다.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다

장장 17년간을 돈줄을 찿아 헤매던 콜럼버스가 우여곡절 끝에 여왕과 잘 아는 팔로스항의 수도원장 마르티나 신부의 주선으로, 1486년 1월 이사벨 여왕을 처음 알현해 탐험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대칸의 나라(원나라)’ 를 찾아가겠다는 이 계획은 특별 심사위원회에 올려졌으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무렵 스페인은 이슬람과 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당시 사령부 겸 임시 궁전이던 코르도바 성으로 불렀다.
◇음양으로 도움 준 유대인들
당시 궁전에는 3인의 마리노 곧 개종 유대인들이 있었다. 궁정 유대인 가브리엘 산체스, 시종 J. 가브레로,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사벨 여왕에게 왕실 재정 사정이 궁핍함을 설명하고 만일 콜럼버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거대한 부를 거둘 수 있다고 권했다. 당시 유럽에는 왕실 내에 ‘궁정 유대인(Court Jew)’이란 특이한 직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이 워낙에 재정 관리와 금융 섭외에 유능했기 때문이다. 궁정 유대인은 오늘날의 재무장관 격이었다.

여왕은 콜럼버스의 요구가 많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자신이 탐험 비용을 부담해도 좋다는 발언에 자극받은 여왕이 결국 그를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 콜럼버스는 여왕과 산타페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세습권을 가진 제독이 되었고, 그가 개척할 식민지의 총독이 되었으며, 개척한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을 소유할 자격을 얻었다. 여왕의 명을 받은 조세관리관이 항해 비용에 충분한 1만7천 대랏트를 콜럼버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사벨 여왕은 자금 제공 외에도 팔로스 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을 내주게 하고, 대항해를 기피하는 승무원 모집에도 과거의 죄를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선원들을 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했다. 드디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라아호을 중심으로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스페인 팔로스항을 떠나 인도로 출발했다.
당시 콜럼버스의 항해를 적극 지지했던 여왕의 재정담당관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으며 궁정의 후원자들은 주로 이러한 개종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일했던 선원은 물론 통역관, 지도제작자, 항해기구 제작자 등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이렇듯 콜럼버스의 대항해에는 음양으로 유대인 과학자들과 선원들의 도움이 컸다.
◇남반구 항해를 가능케 해 대항해 시대를 연 유대인의 ‘천측력(天測曆)’
그 무렵 항해가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탐험했는데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면 대략의 위도(latitude)를 구할 수 있었다. 경도(longitude)는 연안을 따라 항해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위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 또는 남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경도는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 또는 서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위치이다. 그러나 남반구로 내려가면 북극성을 볼 수 없어 위도를 구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랍비이며 천문학자이자 콜럼버스의 멘토인 아브라함 자쿠토였다. 그는 콜럼버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인물이다. 자쿠토는 유대교 신비주의 경전 ‘조하르’를 읽고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곧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 위도와 태양의 적위(Declination)를 계산해 놓은 <천측력>을 히브리어로 간행했다. 이로써 북극성 없이도 위도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남반구 항해가 가능해졌다.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던 해 3월에 이사벨 여왕은 유대인 추방칙령을 내렸다. 당시 이렇게 추방당한 사람 중에 유대인 천문학자 자쿠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로 건너가 포르투갈 왕실 천문학자가 되었다. 자쿠토는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를 설득해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는 데 일조했다. 콜럼버스는 자쿠토가 작성한 항해 지도를 썼고, 유대인 요세프 베치뇨가 개발한 항해기구를 사용했으며, 통역관이었던 루이스 데 토레스도 랍비 출신으로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본 프랑스 학자 샤르르 드 라 론시에르는 ‘이들 중세 유대인 과학자, 지도제작자, 천문학자들이 ‘아프리카를 도는 항해에서 신대륙 발견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발견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난관은 선원 모집이었다. 저 넓은 바다 끝에 가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는 공포감 때문에 배를 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콜럼버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선원들이 채워졌다. 선원의 4분의 1은 승선을 조건으로 사면받은 죄수들이었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에 탑승한 선원 중 우수한 뱃사람, 독도사, 통역, 외과의사 등 중요 스탭진은 유대인들이었다. 콜럼버스가 이런 유대인들을 만났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어쨌든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한 팀이 되어 거친 대서양을 횡단하여 1492년 10월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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