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야기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6] 동전의 양면, 중상주의와 유대인

달무리지는 2023. 1. 8. 20:40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6] 동전의 양면, 중상주의와 유대인

플랑드르, 지리적 잇점으로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다
유대인, 플랑드르 지방으로 모여들다

입력 2022.12.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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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시대가 열리다

16~18세기 유럽은 중상주의(重商主義) 시대였다. /위키피디아

16~18세기 유럽은 중상주의(重商主義) 시대였다. 중상주의란 말 그대로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이로써 상업의 귀재인 유대인의 시대가 열렸다. 중상주의 사상은 한 나라가 부강하려면 무역을 통하여 당시의 화폐인 금, 은을 자국 내에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상주의(Mercantilism)는 중금주의(bullionism)라고 할 만큼 화폐를 중시했다. 이를 늘리는 데 최고의 정책 목표를 두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했다. 한편 값싼 원료의 확보와 수출 확대를 위해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도 정부의 중요한 몫이었다. 한 마디로 중상주의는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정부의 전 방위적인 강력한 계획과 간섭이었다.

모든 특권은 경제를 주도하는 계층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상인들이 유통을 장악해 이윤을 독점했다. 이들이 자본을 축적한 후 공장까지 만들어 생산과 유통을 함께 지배했다. 이렇게 상인주의 시대가 도래하여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충될 경우, 공익을 위해서는 개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리트 주의에 입각해서 일부 유능한 사람들에게 공익을 맡겨야 한다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득을 많이 본 계층이 유대인들이다.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유통과 무역 활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동족 간 단결력이 강하기 때문에 유럽과 중동 전역에 산재해 있는 디아스포라(유대인 공동체)를 연결해 상거래망을 형성했다.

중상주의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강력하게 만들려는 시스템인 반면 자본주의는 능력 있는 개인을 부유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근대 초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큰 갈등 없이 두 시스템이 공존했다. 하지만 절대 왕정을 거부하고 공화정을 추구한 네덜란드는 좀 특이했다. 네덜란드 사회가 1000년 동안 지속된 봉건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철저히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맞았다. 따라서 국가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권이 우선했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중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무역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다. 중상주의보다 자본주의 원칙에 더 충실했다. 한 마디로 유대인에게 유리했다.

경제사에서 중상주의 시대를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300년간으로 보고 있다. 곧 스페인 제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국제무역 중흥기를 거쳐 영국의 산업혁명 직전까지이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던 시기이다. 정복 시대처럼 약탈한 재물로 국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상인 자본의 힘으로 국부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중상주의에 격렬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고, 또 같은 해에 나온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이로 미루어 중상주의는 바로 그 직전까지다.

◇플랑드르, 지리적 잇점으로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다

플랑드르, 현재 벨기에 북부 지역. /위키피디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두 지역에서 피어났다. 하나는 중세 시대 크게 부흥했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Flandre) 지역이다. 플랑드르(영어로 ‘플랜더스’)라는 이름은 8세기에 처음 나타났는데, ‘저지대’ 또는 ‘물이 범람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 지역이 북부 이탈리아와 더불어 유럽 대륙 내에서 지역단위 경제 규모가 가장 크고 1인당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지역의 성장을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중세 교역로 라인강 변에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위키피디아

바이킹의 침입이 누그러진 후, 플랑드르 지역에는 떠나갔던 인구가 다시 찾아들었다. 12~13세기 플랑드르 지방은 북유럽의 모직물 산업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무렵 플랑드르는 북쪽의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남쪽의 지중해 국가들을 연결해 주고 또한 영국과 대륙을 맺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하여 바닷길은 물론 라인강과 그 지류들을 교역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플랑드르가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브뤼헤(브뤼주)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 항구를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했다.

◇비잔틴 제국의 모직물과 견직물 생산기술이 이탈리아 유대인들에 의해 플랑드르로 전해지다

그 무렵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산업은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원래 모직물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 유목민들의 면양 사육에서부터 유래되었는데 뒤에 중앙 아시아를 거쳐 비잔틴 제국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중국에서 훔쳐 온 누에고치로 양잠 산업과 비단 직조 기술도 갖고 있었다. 제국은 이 직조 기술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

테살로니카. /위피키디아

이후 비잔틴 제국의 테살로니카와 테벤의 유대인들이 직물 산업을 주도하며 직조 기술을 비밀에 부쳐왔다.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 때 시칠리아 왕국도 비잔틴 원정에 참가했다.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족 출신 루제루 2세가 다스리는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갖고 있었다. 루제루 2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해군을 파견해 데살로니카와 테벤을 침공하여 유대인 직조공들을 포로로 잡아와 수도 팔레르모에 궁정 작업장을 세웠다. 이들을 통해 견직물과 모직물 산업이 시칠리아 왕국에 뿌리내렸다.

12세기 시칠리아 왕국 영토. /위피키디아

이 기술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 유대인들에게 퍼져나갔다. 그 뒤 밀라노 유대인들은 지력이 좋은 포강 근처에서 누에를 치고 양을 길러, 때가 되면 누에고치와 양털을 시칠리아와 나폴리 유대인들에게 내려보냈다. 그러면 남부에서 이를 가공하여 비단과 모직물을 짰다. 밀라노 유대인들은 이를 다시 수거해 아랍과 프랑스 남부에서 독점 수입한 천연염료로 ‘자색’(紫色, 보라색) 염색을 했다. 이 자색 염색이 유대인의 비기(秘技)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이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산 자색 비단과 모직물은 모든 유럽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왕족과 성직자에게만 허용되었던 색깔이다. 그래서 자색을 ‘추기경의 색깔’이라 불렀다. 그 무렵 직조 기술과 염색 기술은 극비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 공동체 간의 끈끈한 인연은 이를 뛰어넘었다. 결국 북부 이탈리아 유대인들이 플랑드르 유대인들에게 모직 기술을 전파하여 모직물 산업은 플랑드르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브뤼헤(Brugge, 브루게) 시대

1492년 스페인과 1497년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이 종교의 자유와 동족들이 있는 브뤼헤였다. 브뤼헤는 13~15세기 북유럽의 대표항구였다. 지중해에 베네치아가 있다면 북해에 브뤼헤가 있었다. 브뤼헤는 지중해와 북유럽, 영국과 대륙,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대륙 간 뱃길의 길목에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브뤼헤의 성장사를 살펴보자.

◇유대인, 플랑드르 지방으로 모여들다

플랑드르 지방. /위키피디아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내 반유대 정서가 고조되면서 유대인 박해와 살해가 잇달았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바다 건너 플랑드르로 탈출했다. 이러한 이주는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다. 플랑드르 지방은 11세기 이래 영국령으로 유대인들은 영국의 양모를 가져다 이를 상파뉴 정기시에 내다 팔았다. 그 뒤 플랑드르에 모직물 산업을 일으켜 상업 도시들이 생겨나 발전했다.

이후 3차 십자군 전쟁 때인 1290년 11월에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일시에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업에 종사하던 1만 6000 명 모두를 한꺼번에 내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추방이다. 이는 반유대 정서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영국인들이 그간 유대인에게 진 빚을 무효화시키고 영주들이 그들의 재산마저 몰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플랑드르 지방의 브뤼헤 항구였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대륙의 플랑드르와 보르도 지방은 영국 국왕의 영지였다.

브뤼헤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기존 유대인들과 손잡고 당시 최고 상품인 모직물 고급화에 주력했다. 질 좋은 이탈리아 모직물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자기들이 살았던 영국에서 품질 좋은 고급 양털을 선별해 들여와 이를 유통시켜 모직물 질을 한 단계 높였다. 모직물은 주로 프랑스 샹파뉴 정기시(定期市)에 내다 팔고 일부는 영국에 수출했다. 샹파뉴 정기시는 이때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브뤼헤를 대부업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1291년 제노바가 지브롤터 해협을 발견하여 이후 지중해 무역이 대서양 연안 및 북해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베네치아는 해군력을 키워 당시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해상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제노바하고는 100년 소금 전쟁을 치루었다. 그리고 지중해를 넘어 북해로 진출하여 플랑드르의 브뤼헤와 직항로를 개설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상인들이 알프스를 넘는 험준한 육로보다는 해로를 선호하게 되어 프랑스 상파뉴 정기시를 통한 거래 보다는 바닷길로 브뤼헤를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것이 브뤼헤의 상권이 상파뉴 정기시를 앞서게 된 이유였다.

중세 초 브뤼헤의 지도. /위키피디아

브뤼헤에 유대인들이 자리 잡자, 이때부터 그들이 주도해 영국과 양털 교역이, 지중해 국가들과는 모직물 직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1296년 양모 시장이 브뤼헤에 개설되었다. 그리고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1297년 새로운 성벽이 건설되어 도시 규모가 3배로 확장되어 새로운 저택과 창고들이 빠르게 건설되었다. 성 밖을 삥 둘러 판 오래된 해자는 상품 수송 운하로 사용되었다. 해상무역이 발달하자 1300년에는 브뤼헤가 한자(Hansa)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여기서 Hansa는 ‘집단’을 뜻하는 중세 독일어이다. 하지만 그 뒤 이 말은 상인조합을 의미하는 낱말로 변했다.

14세기 브뤼헤에서 작성된 환전 영수증. /위키피디아

그 뒤 1306년에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브뤼헤에 합세했다. 이들의 합류로 브뤼헤는 그들이 취급하던 프랑스산 포도주, 아마포와 양모 등 프랑스 상품의 중심 수출입 항구가 되어 경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브뤼헤는 통과(通過)무역이 번창했고,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업지역이 되었다.

◇브뤼헤, 북유럽 최대의 중계 무역 도시로 성장

운하가 많아 서유럽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브뤼헤. /위키피디아

교역이 늘어나자 금융업이 발달했다. 무역과 금융은 실과 바늘의 관계였다. 중세 이래로 무역이 발달하면 이를 지원하는 금융이 발전했다. 무역과 금융업이 발달하자 브뤼헤에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상설 시장이 열렸다. 나중에는 브뤼헤 직물 시장에 제노바 상인뿐 아니라 베네치아, 스페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먼 거리 상인들도 왔다.

갤리선. /위키피디아

당시 제노바와 베네치아로부터 들어오는 갤리선들은 대개 이탈리아로부터 사치품, 이탈리아산 비단, 벨벳 그리고 레반트로부터 동양 비단과 향신료를 싣고 왔다. 갤리선은 고대부터 지중해에서 주로 군함으로 쓰였는데, 돛도 사용하기는 하지만 바람보다는 수많은 노수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를 지어 운항하는 배다. 중세 이후 상선으로 쓰이는 갤리선이 지중해와 대서양을 거쳐 그 먼 길을 주로 사람의 힘으로 항해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먼 길을 배로 오는 이유는 그래도 육상보다 안전하고 통과세도 덜 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많은 화물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중해에서 북해까지 먼 길을 정기 운항하게 되면서 갤리선은 3개의 대형 삼각돛이 장착되어 노수꾼의 힘보다는 바람의 힘을 더 많이 이용하는 대형 ‘갤리 상선’으로 진화하게 된다. 플랑드르 노선에 투입된 베네치아 갤리 상선은 길이 50m에 폭이 9m로 약 250톤가량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북유럽 최대 무역 도시로 성장한 브뤼헤는 14세기 전반에는 200여 도시의 연합체인 한자 동맹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 무렵 한자 동맹 상인단은 북유럽의 소금, 목재, 곡물, 모피, 꿀, 청어 등을 브뤼헤를 통해 서유럽 전역에 판매하면서 14세기에는 프랑스 상파뉴와 이탈리아반도를 능가하는 번영을 보였다. 그러자 플랑드르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 동 플랑드르주 주도인 헨트의 인구수는 14세기에 8만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브뤼헤도 4만 명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었는데 이는 당시 런던의 인구와 비슷했다.

◇부르고뉴 공국, 1384년 플랑드르의 주인이 되다

그 무렵 플랑드르의 주인이 바뀌었다. 14세기 후반 부르고뉴 공국의 필립 공이 이른바 베네룩스 3국이라 불리는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원래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의 중심부에 있던 나라인데 좋은 지도자 덕분에 국력이 급팽창하여 지금의 독일-프랑스 접경지대 알사스 로렌을 점령했다. 그 뒤 플랑드르 백작 집안과의 결혼으로 저지대의 지배자가 된다.

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뿌리를 둔 부르고뉴 공국은 저지대 도시국가들을 잘 다스려, 저지대 사람들의 근면성과 오랜 상업 전통이 좋은 지도자와 어울려 15세기의 번영을 가져왔다. 15세기 전반부에는 독일 지역, 그리고 후반부에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몰려와 브뤼헤 경제가 더욱 부흥했다.

◇합스부르크가, 뜻하지 않게 독일 왕이 되다

그 뒤 15세기 후반에 플랑드르의 지배자가 또 바뀌었다. 이번에도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가가 플랑드르의 새 주인이 된 것이다. 경제사에서 보면 왕가의 흥망성쇠는 경제적인 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합스부르크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 운도 따랐다. 남부 독일과 북부 스위스에 걸친 지역의 소영주로 일개 백작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가는 뜻하지 않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들이 이 집안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1273년 독일 왕으로 선출한 것이다. 합스부르크라는 성(性)은 그의 스위스 영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城)에서 유래했다. 당시 독일 왕국은 여러 공국의 연합체였다.

◇합스부르크 가문 소금으로 부흥하다

소금 보물창고, 잘츠캄머굿. /위키피디아

이렇게 선출된 루돌프 왕은 고율의 소금세가 왕에게 큰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당시 이를 상징하는 도시가 있었다. 잘츠부르크 외곽도시 잘츠캄머굿(Salzkammergut)은 독일어로 ‘황제의 소금 보물창고’란 뜻이다. 그야말로 당시 소금이 왕에게는 보물이었다. 그림처럼 펼쳐진 알프스 산들과 70여 개의 평화로운 호수 주변에 소금 동굴이나 광산이 많았다. 실제로 이곳이 오스트리아 소금 광산의 주(主) 광맥이다. 이런 곳은 빙하시대 이전에 지반이 해수면보다 낮게 가라앉아 바닷물에 잠겼다가, 그 후 시간이 흘러 지반이 다시 올라오면서 땅속과 동굴, 골짜기 등에 남아 있던 바닷물이 모두 증발하여 소금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인류는 그곳에서 돌소금 곧 암염을 채굴했다. 그리고 주변 지하 샘물에서는 소금물이 솟아났다. 무려 70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루돌프 1세는 소금 세금 덕에 재정이 튼튼해지자 실제 실력자가 되었다. 그를 대적하는 보헤미아 군대를 1278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내쫓아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을 점령했다. 합스부르크가가 오스트리아를 본령(本領)으로 삼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소금 광산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 /위키피디아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은 소금 채굴 이권을 찾아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 잘츠부르크(Salzburg)라는 이름 자체가 소금 성(Salz=소금, Burg=성)이라는 뜻이다. 잘츠부르크는 금, 은, 구리의 산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라이헨할 소금 광산으로 유명하며, 소금을 파내 그 부를 이용해 도시를 만들었다. 지금도 라이헨할은 유럽의 소금 공급지이다.

1308년 알브레히트 왕이 암살된 뒤 15세기까지 합스부르크가는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프리드리히 5세(재위 1440~1493)때 지금의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합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의 소금 광산에서 파낸 돌소금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잘츠부르크 인근 할슈타트의 경우, ‘hal’은 켈트어로 소금이라는 뜻으로 소금 도시라는 의미이다. 거부가 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5세는 1440년 독일 왕에 선출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영주이자 독일 국왕인 프리드리히 5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인수부르크의 은광산과 은 주조공장 그리고 소금 광산 덕분에 더 큰 부를 이루었다.

◇합스부르크가 플랑드르를 지배하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황제. /위키피디아

재력은 곧 국력이었다. 1452년에는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독일 왕 프리드리히 ‘5세’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3세’가 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공국의 연합체 성격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선출직이었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사실 로마와 상관도 없고, 게다가 제국도 아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 3세는 로마에서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질녀인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후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정책의 초석이 된다.

막시밀리안과 마리. /위키피디아

그 뒤 프리드리히는 50년 이상 황제의 자리를 지키면서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세습’을 이루어냈다.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지속 계승하는 합스부르크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는 1477년 아들 막시밀리안을 브루고뉴 공국의 상속녀 마리(마리아) 공주와 결혼시켜 브루고뉴 공국과 저지대를 확보했다. 이때부터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이들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국과 신대륙,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을 손에 넣게 되어 유럽 최대 가문이 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이 몰려오다

15세기 말에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대인 약 30만 명이 추방당했다. 엄청난 숫자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항구 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들의 상업적 재질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정착했다. 브뤼헤(벨기에), 앤트워프(벨기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 런던, 트리에스테(이탈리아), 함부르크(독일) 같은 상업과 교역이 발달한 항구도시에 그들의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업에 종사했다. 이들을 ‘항구의 유대인’(Port Jew)이라 불렀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이들 도시에 몰려드는 유대인들이 많았다. 너무 급격히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면 도시민들 사이에 반유대 감정이 쌓여 결국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때부터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면 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관례화되는 경향이 생겼다. 이즈음 베네치아에서도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자 이들을 특별 구역에 한정해 살게 하는 ‘게토’가 1516년에 생겨났다.

그리고 상당 수의 유대인들이 북부 아프리카와 당시 유대인을 환대하던 오스만 제국으로 몰려갔다. 이후 테살로니카는 세파르디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으로 간 유대인들은 경제를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터키)족에게 대포, 화승총, 탄약, 탄환을 비롯한 군수 제조 기술과 인쇄술도 보급해 주었다. 이후 대포와 화기를 갖춘 오스만 제국 보병은 발칸 반도의 전쟁에서 대포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또 일부 유대인 수천 명이 멀리 인도까지 가 정착한 후 본토인과 피를 섞어 인도인처럼 변했다. 유명한 지휘자 주빈 메타가 바로 인도계 유대인이다.

◇‘중계무역’에 주력했던 브뤼헤의 유대인들, 앤트워프로 자리를 옮기다

플랑드르의 항구도시 브뤼헤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 /위키피디아

그 무렵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 종교의 자유와 동족의 연고가 있는 플랑드르의 항구도시 브뤼헤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였다. 15세기 말 유대인들이 대거 합세한 이후 브뤼헤는 명실공히 전 유럽 최고의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대인들이 떠나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구가 유통 능력이 없어져 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브뤼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쫓겨 온 유대인들 덕분에 ‘중계 무역’이 발달했다. 중계 무역은 통과 무역과 달리 무역의 주체가 유대인이었다.

이곳에 온 이베리아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살았던 이베리아 반도의 특산품들을 특히 많이 취급했다. 스페인산 양모와 피혁 그리고 천일염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철과 남부 산 과일, 올리브, 쌀, 포도주들이었다. 진귀한 품목으로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와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재배되는 커피가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남부지역에는 이슬람들이 재배했던 유럽 유일의 커피 농장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취급 품목과 무역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중계 무역을 위해 들여온 상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가 가치를 높였다. 또한 교역망도 승계되어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상품의 중계무역 이외에도 발트해 연안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으로는 플랑드르산 아마, 모직물과 프랑스 포도주, 독일 맥주가 있었다. 특히 15세기 말에는 수요를 감당치 못하는 브뤼헤의 직물은 황금 직물이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닥쳐온다. 북해로부터 15Km 떨어진 브뤼헤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츠빈 만의 레이 강 수로가 퇴적물로 막히면서 바다로 열렸던 길이 단절되었다. 퇴적물로 인해 더 이상 배들이 접안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도시는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브뤼헤를 중심으로 주로 해상교역에 종사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불운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인근의 또 다른 항구도시인 앤트워프로 발길을 옮겨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