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고전

헬레니즘

달무리지는 2022. 7. 31. 19:36

헬레니즘 세계의 탄생(다음백과에서)

헬레니즘이란 말은 19세기 초 독일의 역사가 드로이젠(J. G. Droysen, 1808~1884년)이 그의 저서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에서 동·서양 문화의 융합이란 뜻으로 처음 사용했다. 이후 그리스인의 언어, 사고방식, 생활방식 등이 다른 곳으로 전파되고, 모방된 문화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대를 구분하는 단위로도 사용되어, '헬레니즘 시대'란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에서부터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시점인 기원전 30년까지를 일컫는다.

알렉산더 대왕의 재위 기간(기원전 336~323년)은 13년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그는 그리스 세계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가 후계자들에게 남긴 방대한 제국은 그리스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고, 향후 약 3세기 동안 전개될 헬레니즘 세계의 무대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시리아·메소포타미아 및 이란 지역에 걸친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 헬레니즘 세계의 각 왕국에는 알렉산더의 후계자들, 혹은 그 손자들이 왕위에 올랐고, 헬레니즘적 군주정이라는 새로운 통치형태가 확립되었다. 이들 헬레니즘 세계의 3대 강국은 그들 사이의 작은 분쟁들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대체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카메오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기원전 172년에 만들어진 유물

알렉산더의 동방 제국은 비록 그의 사후에 벌어진 후계자들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으나, 새 왕국들 사이에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공통어'라는 뜻에서 코이네(Koine)라 불린,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던 그리스어가 알렉산더가 정복한 광활한 지역 전체에서 사용되었다. 그것은 훗날 국경선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전 지역이 문화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이 지역들에서 아테네의 표준 화폐가 사실상 국제 통화로 유통되었다. 이들이 널리 보급된 것은 단지 정치적 지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식민운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아시아와 이집트에 정착했던 병사와 관리, 상인들이 그리스 본토의 사회 제도와 관습을 그곳에다 옮겨 심었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하여 그의 부장들, 소위 상류층 인사들은 모두 그리스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그리스 문화는 동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헬레니즘 국가들(기원전 27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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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도시국가의 전통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온갖 종족과 국적의 토착민과 함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는 일종의 국제적인 문화로서 보편성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시대의 보편주의를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고 부른다. 이는 폴리스를 대신하여 나타난 범민족적인 국가의 등장이라는 환경 속에서 형성된 사고의 경향이다. 견유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디오게네스(Diogenes)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자, 그가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 시대 사람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세계의 시민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 것이다.

폴리스 시대의 문화, 즉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는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이상이 잘 구현된 문화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기가 되면 폴리스들 간의, 또는 인종 간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공동체 구성원은 원자처럼 분리되어 개별화되었다.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현실도피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봉사해야 할 공동체를 잃어버린 그리스인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철학의 중심 주제도 달라졌다. 이상적인 도시국가의 형태나 개인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다루었던 고전기 철학과 정치이론은 쇠퇴하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헬레니즘 철학의 주요 경향을 대변한 스토아주의(Stoicism)와 쾌락주의(Epicureanism), 그리고 견유주의(Cynicism)는 제각기 가르침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한 가지 점에서만은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악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해지는 길을 찾았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신앙 생활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원래 개인보다는 폴리스 공동체의 수호신들이었던 그리스의 전통적인 신들(올림포스 신들)이 폴리스들의 쇠퇴와 더불어 점차 그 권위를 잃어 갔다. 대신에 동방 정복을 통해서 유입된 외래 종교들이 차츰 그리스 세계에 침투하여 토착신들에 대한 믿음이 붕괴하고 남은 공백을 메웠다. 특히 대중들에게 인기 있었던 것은 이집트에 기원을 둔 종교들이었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대에 도입된 사라피스 숭배와 이시스 숭배가 그리스 세계에서 널리 대중화되었다. 그리스인이 수용한 것은 이집트신만이 아니었다. 이시스나 사라피스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아나톨리아의 대모신 퀴벨레 같은 많은 외래의 신들이 그리스 도시에 터를 잡았다. 직접 신과의 접촉을 체험케 하거나 사후의 삶을 약속하는 종교가 특히 그리스인들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종교의 특징은 역시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동방으로부터 유입된 신비교에 대한 신앙을 통해 영혼의 평화와 안정을 염원했던 개인주의적 경향은 당시 그리스인의 인생관 내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은 왕조 숭배였다.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왕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찬탈자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에 정통성을 얻고, 새로운 왕조 창건의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서 종교의 도움을 구했다. 특별한 수호신을 섬기는 것은 거의 모든 신생왕조에 공통된 특징이었으며, 그 수호신들은 한결같이 올림포스의 신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는 헤라클레스의 후예임을 내세웠으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호신은 아폴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특히 디오니소스 숭배에 헌신했는데, 그것은 일찍이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숭배를 확립했다. 그가 죽은 뒤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부친을 신격화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몇몇 왕은 생전에 자신들(그리고 왕비들)의 이름을 숭배대상에 추가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대에 시작된 왕조숭배의 성장은 대부분의 헬레니즘 왕국에 공통 관행이던 '지배자 숭배'라는 일반적인 맥락과 잇닿아 있었다. 헬레니즘 군주들은 통치 체제의 취약성을 종교와 이념의 수단으로 보완하려 하였고, 군주를 신격화했다. 종종 인민이 왕으로서 지배자의 지위를 인정해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신격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도시들이 왕과 그 왕조를 신처럼 예우한 그 배경에는 전통적 신들에 대한 회의주의가 자리 잡아, 결국 실권을 휘두르는 군주들이 신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배자 숭배 관행은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하여 그 문화를 상속한 로마 시대로 이어져서 '황제 숭배'의 선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