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혈포 들고 고종 침소 지켰던 언더우드 선교사
입력 2022.10.20 00:30
국내 대표적 개신교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류영모(68) 대표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온 70평생을 돌아보면 한국 교회는 지금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성장 지상주의와 성공주의로 인해 교회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 나무는 사람 없이도 살지만, 사람은 나무 없이 살지 못한다. 세상은 종교 없이도 살아가지만, 종교는 세상 없이 살아갈 수가 없다.”
가슴 아픈 지적이다. 한교총 주최로 이루어진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탐방(10월 5~7일)’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됐다. 한국에 전래한 개신교의 초심과 일제 강점기에서 일구어낸 역사적 성취를 계승하자는 취지였다. 한 마디로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자는 자기반성이기도 했다.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역사관 앞에서 (왼쪽부터) 서원석 장로, 류영모 한교총 대표회장, 이상학 새문안교회 담임목사가 설명을 하고 있다. 왼쪽 사진 속 인물은 언더우드 선교사이고 오른쪽 가옥은 첫 예배당 사진이다.백성호 기자
우연이었을까. 1885년 4월 5일은 부활절이었다. 그날 오후 제물포항(인천)에 미국인 선교사 두 명이 도착했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였다. 둘은 훗날 한국에 첫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이번 탐방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였다. 신축한 교회 건물은 웅장하고 높았다. 출발은 가정집이었다. 1887년 9월 정동의 언더우드 자택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며 한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교회 이름이 ‘정동교회’였다.
새문안교회 2층에는 교회 역사관이 있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꽤 있었다. 구한말에 고종의 안위는 위태로웠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으로부터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고종 주위의 상궁이나 궁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일본이 언제 매수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이 고종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밤에는 고종의 곁에서 불침번도 서고, 독살을 막기 위해 기미 상궁처럼 고종이 먹을 음식을 미리 맛보기도 했다. 여차하면 덕수궁 바로 옆에 있던 미국 대사관으로 고종의 거처를 옮겨야 하는 처지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밤에 육혈포를 든 채 고종의 신변을 지켰다고 기록돼 있다.

육혈포를 들고 고종의 침소를 지켰다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고종이 하사한 사인참사검. 백성호 기자
고종 황제는 언더우드에게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까지 하사했다. 사인참사검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사악함을 베는 칼’이란 뜻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경신학교(경신 중ㆍ고)와 연희 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도 세웠다. 당시 선교사들이 자국의 이익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언더우드는 조선의 독립과 발전에 마음을 냈다고 평가받는다. 이 때문일까. 새문안교회는 독립운동가도 많이 배출했다.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양자로 입양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한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가 됐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등 독립운동을 했다. 도산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한 새문안교회 교인이었다.
새문안교회 이상학 담임목사는 지난 5일 “한마디로 새문안교회는 한국 민족의 애환과 영욕을 함께 한 교회”라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광화문 연가’의 정동제일교회
서울 광화문 돌담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교회가 ‘정동제일교회’다. 가수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 등장하는 눈 덮인 교회당이 바로 이곳이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97년에 세운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노래 '광화문 연가'에 등장하는 눈 덮인 교회당이 광화문의 정동제일교회다. 백성호 기자
아펜젤러는 서울에 도착한 지 13일 만에 한국인 학생 3명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들은 1년도 안 돼 영어통역을 맡는 관리로 채용됐다. 결국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아펜젤러는 학교 건립도 허가받았다. 고종이 직접 ‘배재학당’이라는 학교 이름도 하사했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 옆에 배재학당을 세웠다.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도 많이 도왔다. 서재필이 세운 독립협회도 지원했고, 아펜젤러는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당시 청년이었던 이승만이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인해 구속되자, 아펜젤러는 이승만의 가족을 도와주기도 했다.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에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파이프 오르간 아래쪽에 송풍실로 통하는 비밀 문이 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안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백성호 기자
정동제일교회 강단에는 국내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그 밑에 비밀 문이 있었다. 5일 교회 측은 무척 이례적으로 비밀 문 뒤의 공간인 송풍실을 공개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이 나왔다. 파이프 오르간을 작동시키기 위한 송풍용 공간이었다. 정동제일교회 교인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그곳에 숨어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총신대 역사교육과 허은철 교수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이 이곳에 숨어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는 건 교회 측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남장로교의 호남 선교
3ㆍ1만세 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마을 주민 대다수가 학살당한 제암리 교회(경기 화성)와 최초의 영어 성경 전래지인마량진(충남 서천)을 거쳐 전주로 내려갔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선 선교 강연에 감화를 받고 조선땅으로 온 미국 남장로교의 '7인의 선발대' 선교사들. 백성호 기자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언더우드는 1891년 아내의 건강이 악화해 잠시 귀국했다. 그는 미국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강연회를 했다. 거기서 감화를 받은 남장로교의 전킨 선교사 등 ‘7인의 선발대’라 불리는 선교사들이 이듬해 조선에 도착했다. 전라도 지역에서 개신교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호남은 곡창 지대이지만 역사적으로 그만큼 수탈도 컸다. 참다못해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됐고, 변화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은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때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서구 열강에 대한 적개심이 클 때였다.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소외당한 이들을 보살폈다. 기생과 백정도 아무런 계급적 차별 없이 대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결국 마음의 문을 열었다.

전주 예수병원 뒤 언덕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다. 백성호 기자
'역사와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인 國父 이승만과 김구 (0) | 2022.11.22 |
---|---|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아덴만 바브엘만데브 해협 (0) | 2022.11.16 |
헬레니즘 (0) | 2022.07.31 |
한일 현대사 - 선우정 칼럼 (0) | 2022.07.13 |
오이디푸스 - 숨겨진 것이 드러날 때(진리. 알레데이아) (0) | 2022.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