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강력계 여형사 - 신창원을 왜 여성들이 감쌌을까? 인간적 대접을 해주서

달무리지는 2024. 8. 27. 17:58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최초의 여성 마약범죄수사팀장,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 '최초'의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여형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왔던 박미옥 형사. 탈옥수 신창원의 검거에 한몫을 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경북 영덕 출신으로 33년이 넘는 경찰 생활 중 형사로만 30여 년을 일한 그는 2021년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 했다. 현재 제주살이 8년 차로, 구좌읍의 한 마을에서 후배 여형사와 한 마당에 각자의 집을 짓고 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눈다. 지난해에는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낸 책 <형사 박미옥>을 출간했다. 1년 만에 8쇄를 찍었을 정도로 독자들의 반향이 컸다.

 

'여경의 전설'로 일컬어지기도 했던 형사 박미옥을 이웃들은 '박 반장'으로 부른다. 여성 강력반장의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됐기 때문일 것이다. <형사 박미옥>을 읽으면서 그가 살인범, 탈주범을 검거하는 강력하고 유능한 형사였으나 한편으로는 감수성이 뛰어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몸에 밴 휴머니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 박미옥, 형사 그 후

제주에 둥지를 튼 '박 반장'의 '형사 그 후'가 궁금해졌다. 그가 맞닥뜨렸던 강력사건에 얽힌 많은 사연은 오늘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로 되새겨볼 수 있을까. 작가로, 강연자로, 때로는 상담자로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도 경청할 가치가 있을 성싶다.

박 반장이 '두 번째 인생의 놀이터'로 마당 한쪽에 지었다는 서재에 마주 앉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가 책에서 토로한 사건들의 맥락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을 첫 번째 화제로 떠올렸다.

그는 당시 서울청 화재감식팀장이었다. 현장에 긴급출동해 밤새 숭례문이 타는 현장을 지켰다. 양녕대군이 쓴 현판이 불에 탔고, 새벽녘엔 2층이 붕괴했다. "화재 원인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향후 복원 순서를 유념해야겠다는 생각을 꼭 붙들고 있었다"는 박 반장은 대목장을 비롯한 문화재 복원전문가들을 긴급 수배해 '복원 가능한 감식'을 진행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글의 제목은 '형사, 감성으로 했습니다'였다. 형사와 감성,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두 단어를 쓴 배경부터 들어보자.

"불이 난 이유도 중요하지만, 불이 난 이후는 더욱 중요합니다. 화재감식이 끝나고 복원전문가들이 왔을 때 훼손된 게 많거나 순서가 뒤엉켜 있거나 잔해들이 개념 없이 쌓여 있으면 복원에 엄청난 지장을 주게 되지요. 그래서 화재감식 과정에 복원을 고려해 순서와 방법을 조절한 것입니다.

 

그날 밤 현장에 수많은 국민이 와서 눈물 흘리는 것을 봤어요. 국보 1호 문화재가 훼손돼가는 과정을 밤새워 지켜본 분들에게 나중에 복원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다른 죄를 짓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재 현장뿐 아니라 어느 현장이든 범인 하나만 잡는 것과 이 범죄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는 건 사실 많은 차이가 있어요.

고전적인 범죄부터 1990년대 2000년대로 시대가 이어져 오면서 발생한 범죄는 그 시대 우리 사회의 정신병리가 바깥으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에 대해 단순히 범죄를 진압한 것만으로는 안 되는, 메시지가 있는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이 점점 온 것입니다. 화재감식만 해도 단순히 불이 난 원인을 찾고 수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바라는 바까지 고려한 활동이 필요한 것이지요."

화재로 사라진 숭례문은 2013년 4월 마침내 복원됐다.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던 시민들의 마음을 읽은 박 반장의 감수성이 결과적으로 복원을 원활하게 한 것이 아닐까. 박 반장의 감성이 빛을 발한 사례로 1997년 1월 발생한 탈옥수 신창원 사건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주목을 받았던 탈옥수 신창원을 잡는데 이바지해 경위로 승진하고 특진을 거듭했다. 이 사건은 여형사 박미옥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 화제의 책 <형사 박미옥> 30여 년에 걸친 자신의 형사 생활을 통해 어떻게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했는지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요즘 두 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 황의봉
<형사 박미옥>을 보면 신창원과 만났던 티켓다방 아가씨 10명을 만나, 그들이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탈주범과 연인관계로 발전한 이야기를 '추궁하지 않고 일단 그저 들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이들이 탈주범으로부터 '사람대접받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박미옥 형사 등 수사팀은 아가씨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탈주범의 도주 방법, 경찰 검문 피하는 방법, 식성까지도 연구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검문 검색 지침을 만들어 배포한 끝에 결국 신고가 들어와 검거하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한 박 반장의 회고를 들어본다.

"저에게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였지만, 탈주범을 잡기 위한 특별팀이 구성돼 장시간 공조수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형사들 세계의 관행이었던 '촉수 우선의 법칙'을 깬 사건이라는 데 의의가 컸던 것 같아요. 범인을 먼저 잡은 사람이 공을 독차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정보를 제공한 사람도, 공조시스템에 긴 시간 노력해서 기여한 사람도 모두 인정받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제가 농담 삼아 경찰청장도 못 만든 공조시스템을 신창원이가 앞당겨줬다고 말하기도 했죠.

당시 8개월이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티켓다방 아가씨들이 왜 탈주범에게 그렇게 우호적으로 대했는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집창촌 문제를 단순히 성매매 단속대상으로만 여겼는데, 이 사건을 통해 집창촌 아가씨들을 구조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상황을 범죄자들이 활용한 것이 드러났죠.

그 후 2001년도에 제가 서울시 3대 집창촌을 집중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창원 사건으로 겪었던 일들이 더욱 리얼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법률적인 관점을 넘어서서 거의 노조 근로조건 수준으로 조서를 받았어요. 아가씨들이 빚을 내고 집창촌에 들어가면 그곳에 영양제 놓는 아줌마, 가구 넣는 사람, 옷 주는 사람, 머리 하러 오는 사람 등 수많은 구조가 이들을 빚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죠. 이후 불법원인급여(불법적인 일을 하게 하는 조건으로 준 선불금)는 갚지 않아도 된다는 새로운 판례가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